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로써 세워지는 결정적인 본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기있는 자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을 쓰시는 것도 아닙니다. 철두철미한 자기계발로 자신을 가꾼 자를 사용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에 "겸손"이 있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줄 알고 또 순종할 줄 아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지난 시간에 살펴본 이새가문의 장남, 다윗의 가장 큰 형 엘리압이 등장합니다. 28-30절입니다.
28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9다윗이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30돌아서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여기서 큰 형이 등장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본문을 대할 때 "누가 진정으로 다스리는 자인가?"라는 질문에서 본문을 본다면, 엘리압의 행태를 소개하는 본문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엘리압은 다윗을 향해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윗보다 어른들이 전쟁터에서 그래도 애써서 싸우려고 있는데, 어린 다윗이 와서 왜 두려워하냐고 질책하니 자존심이 상한 것이지요. 즉 여기서 엘리압이 왜 이새의 가문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지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았을 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하시며 그를 버리셨다고 하셨지요. 네, 엘리압의 마음은 순수하거나 청결하지 못하고 꼬여있고 악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니 다윗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향해서 "교만과 완악"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이 하나님의 영적전쟁을 바라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음은 해석하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다윗을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이나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조롱을 우리에게 대입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항상 그런 식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쟁취해서 안정을 꾀하라거나, 하나님이 바로 나를 위해 움직여주셔야만 한다는 나 중심의 신앙이나, 하나님을 다른 것과 대체하려고 하는 신앙으로 우리를 뒤흔들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는 지금 어떻게 반응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왔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대처했는지, 아니라면 이것을 어떻게 바로잡아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인지 우리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엘리압은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한 다윗과 그의 고백을 싸잡아 "교만하고 완악하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울이 다윗을 부르게 됩니다.
31어떤 사람이 다윗이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전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32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33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여러분, 이 사건을 제가 전에 "굉장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지금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들 속에 각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이 드러나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진정 왕으로 삼고자 하는 자가 누구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싸울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짓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은 작고 미숙한 소년이라는 것이었고, 골리앗은 지금 장성한 자일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용사라는 것입니다. 네,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사울이 틀린 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현실성과 합리적이라는 것 이면에 하나님을 두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과학의 발전에 따라 물질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두터워진 이 때에 현실정과 합리적 판단은 그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한 우리의 판단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조차 마음의 위치, 영혼의 존재, 우주의 시작, 인간의 선함과 악함의 판단기준 등을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네, 사울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 전쟁을 판가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사울에게 무어라 말합니까? 32절을 보니 "낙담하지 말 것이라" 마음을 지키고자 합니다. 다윗은 그 무엇보다도 마음을 지키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소망이 존재하고 있는 "마음"이라는 공간을 왕이 지키고, 그래서 군사가 지키고, 그래서 백성들이 지킬 수 있게끔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연설명을 이어갑니다. 34-37절입니다.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36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37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양을 치던 시절을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고대사회상에서 목동은 가장 하찮은 일이었습니다. 가족들조차 다윗을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도 양을 칠 정도로 다윗은 인정받지 못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양을 다스리던, 이스라엘 군사들을 다스리던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그 고백으로 사울에게 나아 말합니다. 지금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누구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이 확신 속에서 사울은 다윗의 출정을 허락하게 됩니다. 38-40절입니다.
38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39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40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아직 장성하지 못한 다윗이기에 키가 컸던 사울의 군복을 입었다가 벗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편했던 물매만을 가지고 나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은 비현실적인 삶을 살게끔 합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에 일을 하거나 잠을 좀 더 자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말씀을 봅니까? 왜 여기서 하나님의 기준을 배우고 내 삶에 적용하고자 합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사는 삶보다 더 확고하고 소망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다스리는 영역들을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살아갈 때에 "마음에서 하나님을 찾고, 마음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마음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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