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죄악과 싸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고난 또는 훈련”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생은 흑과 백으로 나뉘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땐 맞고 저럴 땐 틀리고, 이 상황에서는 맞고 저런 상황에서는 틀리고, 지금은 이해가 안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해가 되고...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지요.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분별하는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 기준을 무엇으로 두어야 할지 고뇌하게 되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되셔서 선함과 죄악을 나누시고, 특히 창세기 1장을 통해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인 것을 말하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고난과 훈련을 통해서 청지기 삼아 하나님의 뜻으로 선악을 분별하고 다스리는 자로 삼고자 하심을 성경은 선포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기준을 배우는 지혜와 믿음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까지 하셨지요. 이런 인생을 위해 하나님이 솔로몬과 지혜자들을 통해 주신 것이 바로 ”잠언“이겠습니다. 여기에도 회색지대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1장 1-5절을 볼까요?
1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했고, 이를 매우 칭찬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진주를 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진주를 꿰매어서 목걸이를 만들어줄 ”지혜“가 필요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니 지혜는 곳곳에서 역할을 다하게 합니다. 무언가를 알게 하며, 깨닫게 하고, 때로는 훈계를 받으며, 우리의 존재를 바꿔주며, 혈기넘치는 자를 멈추게 합니다. 그렇게 지혜를 구하는 자는 지혜를 더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우리 존재를 성숙하게 변화하게 해줍니다. 훈련을 받아서 성장하는 것처럼 말이죠.
위에서 언급드린 것처럼 지혜는 훈련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오로지 순결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에 다다를때까지 지혜롭게 살게끔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매번 깨닫고 알게 되며 존재의 변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인생, 훈련의 인생, 다스리는 자가 마침내 되기 위해 배우는 인생을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배워야 하는 인생이지 이뤄야하는 인생이 아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결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배우는 자세여야 합니다. 6-9절입니다.
6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인생을 살면서 가지는 것들은 언젠가는 내놓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진짜 가져야 하는 것은 손에 쥘 수 없지만 내 영혼에 쌓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솔로몬은 이 지혜에 대해서 오묘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알 수 있는 지식적인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야만 얻을 수 있는 신비한 것이지요.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자세에 대해 솔로몬은 “경외함“이 기본이라고 말합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멸시“하기에,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지식만을 구하여 뒤죽박죽되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과 세상이 주는 지식은 사실 모두 같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특별히 똑똑해지는 것도 아니고 비신자라고 해서 공부할 때 덜 습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지식을 습득하고 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을 가지고 어떤 지혜를 만들어내는가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방향입니다. 십계명은 부모에게 절대순종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공경하라고 말하지요. 즉 하나님을 향하는 지식을 부모가 줄 때에 그것을 들으며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지식을 부모가 준다면, 그것을 가려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네 인생은 지식을 올바른 지혜로움으로 인도하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은 지혜의 반대로 ”악함“을 이야기합니다. 무식함이나 멍청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함“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10-14절입니다.
10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11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13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지혜가 없는 자들은 악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지식을 가지면 가질 수록 더 악한 법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타인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서 악한데 쓰기 위해 ”계략“을 짭니다. 기다렸다가 치며 피흘리기를 기꺼이 합니다. 아무런 이유와 사유도 없이 죄 없는 자를 죽이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들의 행동의 시작점은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자신의 악함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행동에 어떤 명분, 이유, 근거도 없습니다. 오로지 13절처럼 ”내 집을 채우는 것“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간 사무엘상을 통해서 사울이 어떻게 왕의 자리에서 행동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자신의 채움"을 위한 도구로 삼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에도 그는 자신의 탐욕을 우선시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자, 그래도 "승전을 위한 제사"를 드리게 해달라고 하며 백성들 앞에서 체면차리는 것을 더 우선시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을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오늘 잠언 본문처럼 "나라는 집에 채우는 것"만 생각했던 것이죠. 이런 유혹이 우리에게도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14-19절입니다.
14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5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7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18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9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악한자들이 합류를 권할지라도 지혜는 결코 함께 하지 말 것을 말합니다. 특히 14절에 "전대 하나만 두자" 같은 이익공동체가 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1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한데,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한다'라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위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는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의 반대는 무지함과 무식함이 아니라 "이익만을 탐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이익으로 대체하는 것이지요. 오로지 돈과 재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지인도 이익공동체로 맺는 사람을 향해 본문은 "함께 길에 다니지 말며 그 길을 밟지도 말라"라고 말합니다. 그 결말에 대해서 본문은 "피 흘리는 것"이라는 표현을 두번이나 반복합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생명을 잃게 한다"라고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신데,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죽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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