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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_GH/칼럼_H

깨끗해지기 위하여

by 우루사야 2021. 4. 13.

사람이 깨끗하고 더러워짐은 무엇으로 판단할까? 체취, 입의 말, 행동, 생각, 의지...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많은 것들로 그 사람에 대한 판단여부를 가늠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위기는 하나님의 기준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사람은 본래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운 무언가를 먹고 입고 영향을 받는다고해서 더 더러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깨끗케 하셨기에, 인간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을 존중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더럽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14:2-3)

레위기는 그런 점에서 먹고 출산하는 규례에 대해서 말해준다.(레11-12장)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11:44)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레12:6)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선악과를 만드심으로써 인간에게 "존중"을 요구하신다. 율법의 순종은 윤리적 외형일 뿐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신뢰, 존중, 믿음이 근간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

새김질과 굽에 따라 먹을 동물이 구분되는 것, 비늘이 있고 없고에 따라 나뉘어지는 물고기, 뱀, 곤충 등 먹는 것에 따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주길 원하셨다. 출산과 할례도 마찬가지다. 피를 흘림으로써 생명이 빠져나감과 죽음이라는 것이 왜 생겨났는지, 죄와 죽음의 관계를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 원하셨다. 남아와 여아 출산의 과정에서의 차이도 남녀차별이 아니라 "죄의 역사"를 기억케 하시는 것이다.

우린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런지 도저히 날짜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구원과 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어있을 때, 즉 먹고 마시고 사람을 낳고 기르는 삶의 현장에서 죄에 민감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을 때에 결코 그 날은 도둑과 같이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해준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5:4-6)

그렇다. 우리가 몰두해야 할 것은 이벤트가 아니다. 그 날이 아니다. 오늘 깨어있는 것이다. 그럼 그 날이 올 때 우리는 저절로 그 날을 알게 된다. 영적 민감함은 그 날을 준비하게 해준다. 우리의 본질이 죄인일찌라도, 빛의 아들과 낮의 아들이기에 그 날을 알게 되는 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우리가 진정 싸워야 하는 것은 나의 무지, 나의 지혜없음, 나의 미련함이다. 그것 땜문에 나의 일상이 파괴가 되고, 그것은 그 날을 준비하지 못하게 하며, 결국 자만하여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밤이나 어둠으로 스스로를 밀어넣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6:12)

우리가 우리의 길을 스스로 낼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향한 존중"에 있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 밖에는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율례와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한다. 구약의 율례가 아닌 예수가 주신 율례, 바로 항상 복음 안에서 승리를 확신하며 서로를 권면하고 돌보는 "사랑의 율례"이다. 이것은 무언가 성취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다. 이미 이뤄진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진 "율례"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승리와 성취를 확신한다는 율례를 지킴으로써, 사랑의 율례를 완성하게 된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는 바로 예수께서 이 길을 마련해놓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길을 예수를 따라 걷게 됨으로써 이 사랑의 율례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살전5:10)

[출처] 깨끗해지기 위하여|작성자 우루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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