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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서평_11-12장 아테네, 아레오바고

by 우루사야 2021. 8. 13.

민주주의의 뿌리, 유럽 근대교육의 기초, 고대문화의 산실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떨까. 정치, 교육, 문화의 시발점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테네는 바로 그런 곳이다. 그래서인지 유럽 곳곳의 네이밍들의 어원을 찾아보면 고대그리스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요즘 당연히 자주 등장하는 것이 올림픽일 것이다. 얼마 전 도쿄올림픽이 마쳤다. 그래서인지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세간에 떠돌았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슬로건이었다. "Welcome home" 더 할 말이 있을까. 그만큼 아테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본 장에서 함신주 목사는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짐나지움, 아고라, 아크로폴리스, 심포지움, 아테나를 위한 파르테논 신전, 페르시아 침공 등과 같은 세계사에서 배울법한 이야기들을 재미지게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중에서도 파르테논 신전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해본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 여신을 위한 것이었지만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이어 제국의 국교가 되자 이곳으 ㄴ자연히 예배를 위한 공간이 되거나 교회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를 정복한 후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가 전쟁 시에 무기고와 화약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687년 베네치아 군이 이곳에 포탄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화약이 터져 지붕이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남아있던 그럴싸한 유물들은 19세기 초 영국대사였던 엘긴이 가져가 대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본권 11장 중에서)

인간에게 공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이기에 공간은 필수적일 수 밖에 없는 조건일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는 물리적 존재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였고, 또 다른 타인은 그 의미를 삭제시키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공간으로 대체시켰다. 역사는 그것의 반복이 아닐까? 김영삼 대통령이 조선총독부를 무너뜨릴 때 일본인들이 그 첨탑만은 남기길 바랬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씰 데 없다"고 했다. 한국인으로서 또 새해 첫날 세종로에서 시간 보내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하는 역사관을 함께하는 일인인 것을... 결국 인간은 제한된 공간에서 서로의 의미를 부정하며 자신의 의미를 관철시키며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파르테논 신전이 우상숭배의 공간으로만 알았던 나는 본장을 통해 역사의 산실이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욕망의 발현지로 다시 보이게 된다. 신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던 공간에서 저자는 이제 인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도 바울의 설교로 유명한 아레오바고다. 

"진 에드워드는 '디도의 일기, 아레오파고스'에서 바울의 설교를 이렇게 그려낸다. "글깨나 읽었다는 청중들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철학자 아라투스까지 끌어냈다. 파에노메나를 비롯해 여러 저서를 남긴 3백 년 전 인물이다. 바울이 인용한 구절은 '우리도 그의 자손이다'라고 한 대목이다(행 17:28)." 소설이지만 개연성이 짙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인데,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바울이 그저 말쟁이에 불과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본권 12장 중에서)

아레오바고 설교를 들은 그리스인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의 논리와 설득력은 둘째치고, 바울의 강한 어조와 확신, 결의에 찬 표정을 나는 보고 싶다. 어렸을 적에는 웅변이라는 것이 있어 무언가 주장하는 이들의 표현이나 발성을 보면서 사람들은 확신을 얻기도 했다. 유세현장이 바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것이 논리나 필력으로 대체된 듯하다. 아니면 가벼운 공감이 되거나. 어쨌든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현대를 살아가는 목사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 논리와 공감이 중요한 세대인 만큼,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동의가 되는 선언적 설교, 복음의 설파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함신주 목사가 가슴 시원했다는 구절에 나도 한 표를 던지게 된다. 그 구절로 글을 마쳐본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행17:24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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