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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서평_9장 에베소

by 우루사야 2021. 8. 11.

본인은 블로그 표지에 써놓았듯이 '고뇌는 후회를 낳지 않는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다. 기질상 생각보다 감정이 우선시 되었던 젊은 시절을 생각해보며, 나이값을 하기 위해 또 후회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기를 즐겨하고자 했다. 이제 돌아보면 감정이 우선시 되어서 잘 되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당장 임기응변으로 문제를 덮어두기 보다는, 고뇌할 때 당장은 힘들더라도 미래가 평온해진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철학이 발전하려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번영과 삶의 평온은 삶에 대한 지지한 고민으로 인하여 열매처럼 얻는 것이다. 밀레토스는 지리상 고난을 겪으면서 철학과 문화와 번영의 도시가 될 수 있었다."

밀레도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이별한 장소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 끌어안고 울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20:36-38) 이 장면을 생각해보면 진정한 공동체가 무엇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 공동체가 어떤 결단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생각하게 한다. 복음 안에서 무엇이 성공일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어떤 것인가라는 고민은 교회로 하여금 후회하지 않게 한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은 성령 안에서 알고 있었고 또 결단했다. 작별을 말이다. 하지만 현대 교회에게 작별은 있기나 한 것일까? 파송의 이름보다는 영역확장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작별은 인간이 고안해낸 아주 좋은 위안법이다. 작별을 통해 아쉬움을 보내고 슬픔을 달랜다. 위안하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죽음과 마지막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면 작별이라는 위안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결국 현실에 지나치게 충실하게 된다. 마치 이별이 없을 것처럼 살아간다. 썩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현실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은 어쩌면 작별과 이별이 주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일수도 있다." (본권 9장 중에서)

동선때문인지 아니면 의도된 편집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함신주 목사는 이별의 장소에서 이제 또다른 이별의 장소로 우리를 인도한다. 터키 서남쪽 끝에 위치한 셀축은 사도요한기념교회가 있는 곳인데, 이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다. 요한은 이곳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기도 했다.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한. 이들의 관계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최후의 만찬에서 작별한 스승과 제자,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작별한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국 땅에서 작별하게 된 스승의 어머니와 제자의 작별, 마지막으로 부활하시어 환상과 계시로 작별한 스승을 만나는 제자. 이들의 관계는 만남과 죽음의 작별, 그리고 또 다시 만남의 반복과 연속이었다. 

에베소하면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은장색들의 핍박을 받은 사건이 아닐까 싶다. "32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행19:32,34) 아데미와 무리의 관계는 알지 못하는, 감정과 소요에 휩쓸린, 마침내 "흩어져 없어져버리는 안개와 같은 관계"가 아니었는가. 그들을 그렇게 소요케 하고 요동케 했던 것은 아데미가 아니었다. 자신의 욕망과 탐욕이었다. 본래 있지도 않았던 모순된 관계는 추구할 수록 더 허망하기에, 더 외쳐보고, 더 채찍질해보, 더 남탓을 해본다. 하지만 남는 것은 분노하고 요동치는 허탈한 자신의 모습일뿐이다.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준 복음으로 이어지는 관계와 우상으로 인해 생긴 관계. 양극단, 아니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에베소라는 공간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 사이 함신주 목사는 요한계시록으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2-4)

에베소의 소요와 혼돈 속에서도 바울은 굳건했다. 복음으로 굳건하여 로마로 가기 위해 죽음의 위협을 뚫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다. 복음의 확신은 조용하지만 굳건하다. 그러나 모순과 혼돈은 허망하여 자신을 드러내고자 온갖 소리를 내고자 한다. 하지만 마침내 속이 비어있는 것이 드러나 버리고 사라지고 만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을 질책하신 것은 아닐까? 그들이 바울과 같이 굳건한 복음의 확신으로 살았던 것을 예수님은 "안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아마 가장 큰 칭찬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그 처음 사랑의 발원지, 즉 복음의 확신이 사라질 것을 질책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성령으로 충만하여 순수한 교회를 지키고자 했던 에베소 교인들, 그들의 첫사랑을 회복해야 사라지지 않을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풋풋한 첫사랑을 언급하는 대목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함신주 목사가 본인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준 적이 있다. 물론 그 자매와 몇 안되는 만남에 연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누군가를 소개해준다는 것은 서로를 향한 인정과 신뢰가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아직까지도 함신주 목사와 함께 연이 닿는듯하다. 관계는 존재하는 이들의 소유물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이와는 연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삼고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증거)해주고 계신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인도하여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게끔, 그것도 담대하게 나아가게끔,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게끔 해주신다. 모순덩어리뿐인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시고 또 불러내어 관계하시고 더 나아가 아들로 삼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관계이다. 첫사랑의 순수한 관계로 다시금 불러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해보며 이만 글을 줄여본다. 

마지막으로 함신주 목사가 생각하는 이사야가 어떤 사람이기에 소개팅까지 주선해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호감적이었나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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