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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서평_10장 고린도

by 우루사야 2021. 8. 12.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로마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다루게 되는 본문은 고린도 전후서 일 것이다. 양으로 봐도 다른 서신서들보다 길기도 하고, 더욱이 이 서신들이 다루고 있는 목회적인 실제 이슈들이 현대교회들에게도 쉽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린도전서는 특히 부활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교회의 상황들을 풀어내려고 바울은 노력했다. 교회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방향, 바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현실적인 교회의 이슈들을 믿음으로 해결해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고린도를 다루는 본권 10장은 3번째 파트를 시작하는 장이기도 하다. "인간의 얼굴이 있는 장소를 걸었네"라는 네이밍을 가지고 있는 3번째 파트는 앞으로 아테네, 아레오바고, 테르모필레 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목차만 보아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끔 한다. 그래서 함신주 목사는 3번째 파트를 시작하는 장에 이런 글귀를 넣어놓았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집중은 하지만 집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명에 집착하고 삶에 집중한다."

본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상태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 오히려 선악을 분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논할 필요도, 그것에 집중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 눈을 감기게 했고, 덜 중요한 것에 집착하게끔 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수치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두려움에 벌벌 떨기 시작했고, 가죽을 얻기 위해 살생을 처음으로 저지르게 되었다. 죽음을 직면하게 된 그들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처해야 하는 나락이다. 알 필요도 없었고, 몰랐던 것이고, 경험하지도 않았던 감정과 생각, 경험들을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산더미처럼 떠안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 존재에 있어서 모순과 부조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카뮈가 발견한 시지프스의 삶은 분명 끊임없이 돌아가는 인생의 굴레 속에서 사는 것이다. 부조리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부조리 속에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찾는다. 끊임없이 굴러 내리는 바위를 끌어올리며 실존적인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에 의하면 시지프스는 행복한 사람이다. 굴러 내리는 바위가 삶을 향해 살아내야 할 도전과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신들이 시지프스를 바라보던 것처럼 시지프스 산을 바라보았다. 시지프스는 돌을 다시 굴려 올리면서 신들과 삶의 부조리를 향해 경멸과 비웃음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삶의 의미를 저 산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시지프스의 신화를 카뮈가 잘 해석한 것인지 모르겠다."(본권 10장 중에서)

아들과 스무고개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맞추는 입장이었는데 아무리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들어도 도저히 답을 유추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패배를 인정하고 답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비상구"였다. 그래서 물건은 물건인데 생물은 아니면서 눈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던 것인가. 조직신학을 배우다보면 죄론 파트에서 "사다리 비유"를 듣곤 한다. 사다리 한 계단이 사라져 첫 번째 계단과 세 번째 계단 사이에 구멍이 더 생겼는데 이 구멍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주전자이다. 주전자에 있는 물을 따르면 나오는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이 과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다. 주전자가 있기 때문에 그 구멍이 존재하는 것이지, 주전자 자체가 없다면 그 구멍은 없는 것이다. 이 두 비유 모두 "본래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는 죄의 속성"을 말하고자 차용되는 비유들이다. 죄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도 아니고 작정하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부재, 언약과 선과 생명의 부재가 이런 구멍을 만들었고, 그것을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죄에 묶여 평생을 살아간다. 굴러내려 오는 죄는 올려놓아도, 이겼다고 생각했어도, 해결했다고 판단하는 그 순간에도 다시금 인생을 짓누르고 억압하고 옭아맨다. 다음 계단으로 나아가기 위해 없는 사다리 계단을 찾으려 발로 허우적대느라 평생을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인생일까, 주전자 없이 주전자 구멍을 찾아 그 속에서 생수를 얻으려고 고뇌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삶인가? 과연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가 여기까지, 인간의 실존은 어디서 설명될 수 있을지 고민된다. 

"우리는 비록 시지프스 산에 사는 것 같을지라도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있다. 하나님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고 온전한 사랑이신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본권 10장 중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 의미가 주는 만족과 도전, 동기부여 속에서 참된 인생을 향유하며 죽음과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삶. 그것이 복음의 삶과 공동체가 아닐까? 사회이슈에 대해 교리로 뒤범벅 시켜버리는 보수교회들도, 사회이슈에 매몰된 나머지 성경까지도 왜곡해버리는 진보교회들도 과연 삶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고 있는 것일까? 고린도에 있는 바울기념교회 마당 모자이크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바울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이 느낀다. 지금 당장 옆사람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바울을 계속해서 일으키시고 세우시고 도전하신다. 그리고 바울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금 비마에 올라 "인생의 참된 의미"를 전한다. 과연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향이 어디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 1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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