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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서평_3, 4장 데린쿠유 지하도시, 비시디아 안디옥

by 우루사야 2021. 8. 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9:23-24)

R.C. 스프로울은 "모순과 신비"를 대비시키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다. 모순은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거짓말일 뿐이다. 하지만 신비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인간의 논리나 과학적 실험으로는 증명이 불가한 것을 뜻한다. 신비의 존재 하나님, 그 분의 말은 때때로 역설적이기도 하다. 신비한 존재의 역설적인 가르침은 물리적 제한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초자연적인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되뇌이게 만든다. 그리고 함신주 목사도 그랬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예배는 사실상 현실을 넘어 비현실적 삶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 나라 말이다. 그래서 예배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아야 한다. 예배당을 들어올 때는 죽음을 경험하며, 나갈 때는 부흥의 능력을 입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예배다."(본권 3장 중에서)

우리는 때때로 예배 안에서 나를 찾고 싶어한다. 찬양을 크게 함으로써 속이 풀리고 통성기도를 해야 기도를 한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주일예배는 정중해야 하므로 찬송가만 불러야 하고 일절 전자음악기기를 써서는 안된다. 과연 이런 기준은 누구에 의해 정해진 것들일까? 과연 이것은 획일화 될 수 있는 문제인가? 이것은 자신을 위한 예배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오히려 예수는 우리에게 죽으라 말한다. 자신의 기준을 내려놓으라 말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시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예배가 세워지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역설의 신비 앞에서 제한과 한계가 가득한 인간이 죽어야 초자연적이면서도 인격적인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 만유에 대한 섭리를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 죽으심으로 우릴 살리신 역설의 구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만한다. 마찬가지로 (물리적인)교회가 죽어야 (하나님의)교회가 산다. 

"야! 다 무너진 교회 터랑 돌들 밖에 없을 텐데, 거기(터키-그리스순례여행) 뭐 볼 게 있다고 가냐?"
"형, 그거 보러 가는 거죠. 다 무너진 교회 터를 보러 가는 거예요. 가서 중요한 건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오려는 것이죠." (본권 4장 중에서)

함신주 목사의 대화에서 다시금 자판에서 손을 떼고 생각에 잠겨본다. 그럼 교회는 무엇일까?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일까? 복음적 시스템일까?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교회가 사람이라는 말도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다. 그럼 교회는 무엇일까? 복음만 전하는 것이라면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이 때 노방전도는 얼굴에 침 뱉는 격이 되어버렸다. 과연 이 시대에 교회는 무엇일까? 

"이제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나라 확장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는다. 겨자씨 같고 누룩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미물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이들을 세워 그들이 사는 곳에서 복음을 살아냄으로써 영향력을 발위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루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영접하고 성령이 내주하는 그리스도인은 있는 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본권 4장 중에서)

본인도 이제 마흔을 앞두고 있는터라 부교역자 생활을 마치고 어떻게 사역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본질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목사가 무엇이고, 사역이 무엇이며, 성도와 모인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속에서 함신주 목사의 고백은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복음을 살아낸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이것이 얼마나 힘든가? 바울과 함께 걸으며 복음을 살아내는 것도 힘들겠지만, 현대 한국에서 복음을 가지고 동성애 문화, 극단주의적 정치상황, 정교분리가 애매해져 광화문 앞에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 국기가 함께 있는 광장, 인구감소로 인한 많은 사회현상 등 수 많은 상황들이 이제 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 길 속에서 복음적 삶을 살아내는 것 또한 힘들다고 바울은 말해줄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시대에 이 상황에서 우리를 동시대에 살아가며 복음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게끔 해주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 그리고 이 삶을 살아내면 그제서야 우리도 "예수쟁이"가 되리라. 그리고 그 장소는 우리의 "믿음의 결단"의 장소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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