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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서평_5장 라오디게아

by 우루사야 2021. 8. 5.

지인들과 통화를 하거나 만날 때면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을 주고받곤 하는데, 요즘 내 대답은 "참 좋아"라는 답이다. 개인적으로 20년에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왔다. 21년이 되어서도 사역을 최대한 줄이고 가정을 돌보며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시간을 통해서 어려웠던 시간들에 대해서 정리하고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요즘이다. "목사의 삶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아무리 대답을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었는데, 어려움을 겪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그 답을 조금씩 찾아가니, 고난의 시간이 유익이라. 이 질문에 답을 몰랐던 것은 누군가가 답을 알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몰랐던 것이고, 고난으로 헛된 시야를 벗겨주시니 내 욕망과 욕심이 벗겨지고, 묵혀왔던 질문의 답을 저절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본권 5장을 읽으며 이 생각들이 내내  떠나지 않으며 함께 묵상케 되었다. 함신주 목사가 설명해주는 충격적인 백합화과 백합의 차이는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날 때 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 먹고 사는 것에 집착한다. 살기 위해 살아가고, 살기 위해 염려를 붙들고 살아간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 죽음의 문제를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살기 위해 염려를 붙들고 살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경험을 한다. 죽음의 문제가 예수 안에서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부활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본권 5장 중에서)

과연 우리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일까, 아니면 살기 위해 죽음에 맞서고 있는가. 그것은 지금 현재 내가 고난과 삶의 여건들을 어떻게 직면하고 있는지 직시함으로써 깨닫게 될 것이다. 목사로서, 아비로서, 아들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이중직으로 고민하는 알바생으로서. 그리고 주님은 더 깊은 심중을 찌르신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자은 자들아". 백합화 이야기로 문을 열어젖힌 후 라오디게아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레 한국교회 상황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들은 재산뿐 아니라 영적인 부요함까지 자랑했다. 자신의 경제적 번영이 영적인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었다. 부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면, 분명 자신들이 영적인 생활을 훌륭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질의 풍요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나온다는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네가 실상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다."(본권 5장 중에서) 

서울과 수도권의 있는 교회들 중 50여년 이상 된 교회들은 아마도 자가 소유의 부동산들을 가지고 있고 현시세에서 그 땅들은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럼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일까? 그런데 이런 방식의 문답이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에게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로 이름을 짓기 전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받았던 책망을 다시금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이어지는 질문과 자책 속에서 함신주 목사는 우리를 라오디게아 예배당으로 인도한다. 세례단으로부터 시작해 예배당으로 가는 길을 걷게 되는 신자, 그리고 예배당 안에서 설교단의 위치로 보는 설교자의 자세. 그 안에서 교회는 교회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5장은 다 읽어도 더 많은 질문들을 남기게 한다. 영화 기생충을 보고 리뷰채널들을 찾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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