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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 걸었네 서평_6-7장 빌라델비아, 사데

by 우루사야 2021. 8. 9.

모르는 걸 타인에게 알려주는 것만큼 곤욕은 없다. 정립되지 않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복음에 대한 불확신은 사역에 있어서 오히려 혼돈을 가져올 수 있다. 본인은 그렇게 20대 사역생활을 했던 것 같다. 일찍 사역을 시작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뒤따르는 듯하다. 함신주 목사가 부친께서 담임목회하시는 교회에 중고등부 사역자로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 여름캠프 기도회로 세워준 때가 있었다. 사실 지금 돌아보면 그 때 명확하게 내가 복음을 확신하고 기도회를 인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든다. 그래도 함께 세워주고 인도해주었고 또 이끌어준 함신주 목사에게 지금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어쨌든 많은 것에 있어서 명확하지 않았던 나 자신과 사역생활에 대한 기억이 뇌리 깊이 있었던터라, 파묵칼레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골로새 지역의 차가운 물은 목마른 이들에게 생수가 된다. 살아나고 회복된다. 히에라볼리에서 발원한 온천은 따듯해서 치유하는 물이 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로 흐르는 온천수는 흐르는 만큼 미지근해져 목욕은 커녕 먹으면 질병을 유도하고 구토 증세를 동반한다. 그래서 성경해석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을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미지근한 신앙태도를 버리고 생수처럼 차갑든지 온천처럼 뜨겁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권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열정이 문제가 아니라 미지근한 그들의 삶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본권 6장 중에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골치를 아프게 하는 것을 꼽으라면 나는 "극단주의"라고 말하고 싶은데, 좀 더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꼰대"이지 않을까 싶다. "젊은꼰대"까지 나타났다고들 하는데 속내를 보니 도통 대화와 소통이 되지 않는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세계관으로 사고가 굳어져 변화하는 시대를 따르지 못하는 나이든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인 꼰대에서 이제는 극단적이고 협소한 세계관을 가지고 타인과의 소통은 불가한채로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여타 다른 주장에 대해서는 이성적 비판이 아닌 비난과 조롱을 섞는 이들을 총칭하는 단어로 변한 것이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차갑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신 말씀은 극단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다. 냉수로서 때로는 온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데, 자신의 사고에 갇혀 젊은 꼰대가 되어 일인분(?)을 다하지 못하는 꼰대가 되지 말라는 것으로, 20대의 명확하지 않았던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리고 40대를 앞두고 있는 내가 나만의 확신에 갇힌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내가 혹여나 젊은 꼰대는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러는 사이 저자는 이제 우리를 위로의 교회로 안내해준다. 계시록 7교회 중에 칭찬이 가득했던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한가지는 '삶'이다. 인생을 향유하려는 문화 속에서 가장 필요하고 감동을 주는 것은 삶이기 때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그런 독특한 삶이 있었다. 작은 능력으로도 인내하며 사는 삶,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세상과 구별되면서도 영향을 주는 그들의 삶이었다. 아마 이 작은 공동체는 그들이 가진 작은 힘을 가지고도 능력있게 살았을 것이다. 포도를 생산하는 지역에 있는 이 공동체는 소아시아 내 300여 교회에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했다고 한다."(본권 6장 중에서)

삶을 향유하려했던 이들이 가득했던 빌라델비아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내려고 했던, 복음을 삶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구원의 확신이 자연스레 드러났던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삶을 정확히 인지하거나 확인할 수 없지만,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알고 있는 그 예수를 따르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 교회를 칭찬하셨을 것이다. 환경에 현혹되지 않고, 세속에 섞이지 않고, 예수를 따라 주변을 변화시켜왔던 그들의 삶이 과연 현대한국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아낼 수 있는 삶인지 또 사역으로 어떻게 발현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 순간 칭찬받았던 빌라델비아 교회와 달리 사데 교회는 주님께 책망받은 교회로 알려져있기에 두 장을 함께 읽어보고 싶어져 책장을 마저 넘겼다. 함신주 목사는 본권 7장에서 그리스로마신화 중 헤라와 헤라클레스와 사데지역의 투몰루스 지형을 통해 고대 사데의 번영과 군사적 요새로서의 이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 지역 속에 있던 사데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어떠했을까?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1-3)

사데 교회를 질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함신주 목사가 말한 것과 같이 계속 반복되는 단어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함 목사는 이렇게 해석한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기록될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데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렀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했다. 행위의 온전함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그러니 분명 살았다 하는 이름인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지만, 그들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요즘 기사에 종종 보이는 '대면예배강행'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각 교회가 상황과 환경이 있고 그에 맞춰 공동체에 적절한 조치가 필요할 것이고, 담임목사는 가장 합당한 절차로 이번 코로나 상황을 겪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까이하고자 하는 예배를 위해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을 강행한다는 행위에 대해서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이 행위는 예배일까 욕망의 분출일까. 나도 사실 정답을 모르겠다. 주님이 어떻게 보실런지 모르겠다. 내가 담임목사가 아니라 절실함이 없는 이번 야구대표팀과 같은 것은 아닌지도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욕망인지 자문해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인 것만큼은 확실할 것이다. 
어쨌든 '살았다 하는 이름'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넋놓고 살고 있다가 정작 주님을 만났는데 '실상은 죽은 자'라고 불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빌라델비아 교회로 살런지 아니면 사데교회로 살런지, 또 아니면 다른 다섯교회 중에 어떤 삶을 살런지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오늘 나의 믿음과 의지에 달렸음을 생각하며 이만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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