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연구_DE

"바울과 함께 걸었네"서평_2장 성도의 얼굴이 있는 장소를 걸었네

by 우루사야 2021. 8. 3.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을 지으려 합니까? 더 커진 곳간이 또 차면 그 때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그것들을 헐고 다시 더 큰 것을 짓지 않겠습니까? 곳간을 갖고 싶다면 가난한 이들의 뱃속에 곳간을 지으십시오. 천국에 여러분을 위한 보물을 쌓아두십시오." 2장에서 함신주 목사가 인용한 교부 바실레이오스의 말이다. 이 책에서 알게 된 것은 바실레이오스의 경제관념이 근래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 "로컬"이라는 개념와 많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의 이동과 교제, 만남, 교류가 끊어지자 세계 각 도시들은 각자도생해야만 하는 위기아닌 위기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왜 이것이 위기같지 않은 위기일까? 세계화로 인해 각 도시들은 더 저렴한 소비를 위해 인접도시가 아닌 지구 반대편으로부터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글로벌 경제교류는 끊어졌고, 당장 소비해야 하는 물품들을 각 도시가 그 안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은 물류유통 시스템이 잘 되어 있던터라 사재기 현상이 덜했다고 평가 받았다. 사실 전세계에서 보았을 때 서울이라는 로컬은 2년여간 코로나 상황에서 로컬로서 잘 버텼다는 것이다. 다른 대도시들에 비해서 말이다. 앞으로는 더 세밀하고 소규모화된 로컬개념이 요구될 것이다. 서울시라는 행정체계보다 더 작게 각 도시가 이겨내야할 재난과 위기상황이 올 수 밖에 없겠다. 그 때 요구되는 정신이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19:21) 

예수가 말한 것처럼, 교부 바실레이오스가 바실레이아스를 세운 것처럼, 함신주 목사가 소개한 공동체생활처럼, 우리에게는 분자화된 관계에서의 나눔이 필요하다. 아니 이미 복음으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우리는 로컬화가 내재되어 있다. 성령이 주시는 감화로 우리는 가난한 이를 바라보면 나눌 수 밖에 없고, 아픈 이를 보면 돕고자 하며, 숨이 헐떡거리는 이를 보면 함께 손을 붙들게 된다. 그 나눔의 정신을 함께 공유한채로 함목사는 괴레메 동굴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 속에서 자신의 것을 나누며, 세상이 세워주는 명망을 피해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해 동굴로 찾아든 나그네를 소개하며, 함목사는 이렇게 우리에게 언급한다. 

"고대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을 하나님의 축복이요 뜻이라고 생각했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것이다. 어떻게 자발적 가난을 실천했을까? 함께 사는 것, 나누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나누는 삶을 실천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모일 때 그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천국과 같은 삶을 살기 원한다면 나누며 살아야 한다."(본권 2장 중에서)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나눈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대인에게 있어서 경제권은 자립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경제권의 부재는 스스로의 존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은 역설로서 그리스도인의 존립을 말한다. 나눔으로서, 자기를 비움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자기 자신을 추구할 것을 말한다. "명망을 얻은 이들이 명망에서 벗어나고자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나그네들처럼 말이다. 세상과의 이분법적인 이들의 행보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세워주실 것을 믿음으로, 아니 이미 주어진 칭의를 믿으며 타인으로 세워지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벗어나고자 하는 복음의 확신으로 주어지는 그들의 행보를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이다. 

함목사는 두 번째 욕망을 벗어나기 위한 고독의 장소, 파샤바 계곡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속에서 "완덕"을 이루고자 했던 이들을 소개하며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묻게 만든다. 백석대 채영삼 교수는 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주고 있는데, 공동서신서들이 말하는 믿음에 근거한 "선행"이라는 스펙트럼이 복음서-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다리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서신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완덕은 이미 율법을 이루고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신비적 연합으로 내재하심으로써 우리 안에서 이미 이뤄졌지만, 우리의 행실로 나타나는데 있어서 현세적 조건들의 충분조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현세에서 완덕이 이뤄지지 않겠지만, 완덕의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는 자연스레 그 길을 향해 걸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들이 계속 이어지다보면 고대 이스라엘과 지중해 연안에서 활동하던 교부들과 수도사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자신들은 다시금 모압평지로, 이집트 사막으로, 아라비아 광야로 떠났다. 아무것도 없고 나아갈 방향도 없는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금 세속에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목사는 우리도 이 길로, 우리가 가진 빈 방으로, 하나님이 계신 은밀한 곳으로 나아가기를 권면해주고 있다.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 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본권 2장 중에서, 지그문트 바우만 인용문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