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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절기설교

부활절08. 드러나는 예수

by 우루사야 2022. 4. 19.

본문 : 요11:39-44
제목 : 드러나는 예수

1. 서론
오늘은 축구이야기로 시작해보려합니다.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축구대표팀에 많은 관심이 몰렸습니다. 금메달을 딸 경우 많은 선수들, 특히 손흥민 선수가 군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죠. 그래서인지 감독으로 있던 김학범 감독의 선수선발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비주류로 불렸던 김학범 감독이기도 했고, 또 선수 중 1명을 비주류 공격수 황의조 선수를 뽑아서인지, 실력이 아니라 인맥으로 구성했다고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걱정과 비난은 기우였습니다. 황의조 선수는 첫경기 헤트트릭을 포함해 7경기에서 9골을 넣었고 결국 득점왕이 되었고, 당연히 대표팀은 금메달을 따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2018년 올해의 선수로 손흥민 선수를 제치고 황의조 선수가 선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의 지도자상에 김학범 감독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김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상을 받으니 아시안게임 때 있던 선수들이 생각난다"면서 "함께 고생했던 우리 선수들과 이 영광을 함께 나누겠다"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드리냐면 "영광"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광의 사전적 정의는 존경할만 한 것이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축구협회는 김학범 감독과 황의조 선수가 모두의 비난과 조롱 속에서도 굳건하게 팀을 이끌어 우승을 해낸 것에 대해서 존경할 만한 부분이 있기에 그들에게 영광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영광을 표현하자면 "너희가 옳았다"고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누가 옳았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럼 생각해볼까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거나 우리가 영광 속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많이 들어보셨지만 사실 손쉽게 와닿지가 않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옳았다는 것이고, 우리가 옳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감격스러운 부활절을 보냈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며 끝낸 것이 아니라 2달간 하나님의 방법이 맞는지 안맞는지 경험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내려가면 하나님이 높여주시는지 살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여기서 우리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봤더니 정말 내 인생이 잘 흘러가더라, 결국 하나님이 옳더라! 라는 고백을 서로 주고받거나, 누군가의 고백으로 내가 용기를 얻어 나도 같이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기로 결단하거나 말이죠. 지난 주에 소그룹 모임을 하지 못한 것이 참 아쉬웠는데, 오늘은 꼭 함께 하셔서 그 나눔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모임 속에서 하나님이 옳다는 영광이 드러날 수록 교회는 진정 부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친했던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은 죽을 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11)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이 상황을 통해서 한 인간이 죽어서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동시에 예수가 이제 며칠 있다가 죽을 것이고 다시 부활할 것인데 예수를 따라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길이 열렸다고, 그 옳은 길이 열렸다고 미리 알려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해줍니다. 인간으로써 죽으라고, 하나님이 다시 살려줄 것을 믿으라고 말이죠.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죽음과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은혜가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2. 본문

1) 낮아지는 인간, 예수님의 계획

먼저 나사로의 부활이야기를 살펴보려면 또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야겠습니다. 왜 이렇게 자꾸 예수님이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십니까? 우리가 자꾸 위로만 올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올라가려는 자는 내려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시려고 이번 나사로 사건에도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십니다. 6절입니다. "6나사로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5절에 보면 요한은 예수가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라는 3남매를 아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병에 걸렸으니 낫게 하든 아니든 어차피 예루살렘 가는 길에 바로 옆에 있던 베다니에 살던 그들에게 들르러 얼른 출발을 할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나 나사로거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도착해서 들으신 소식은 나사로가 죽은지 4일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천천히 오신 것이죠. 예수님이 빨리 출발하셨으면 나사로를 만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나사로의 누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예수님의 반응도 함께 유의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32-33절입니다.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나사로의 장례식이 끝난 그 집에 가셔서 보시니 그들이 울고 있는 현장을 보셨고, 그것을 보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게다가 35절에서 예수님은 눈물까지 흘리십니다. 이중적인 모습 아닙니까? 이렇게 비통하고 마음아프시다면,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오시든 날아오시든 순간이동을 하시든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하셨던 것은 2일을 더 계셨던 그곳에서 머물러 있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하셨던 3남매였고 나사로의 집 현장을 비통하게 여기신것과 태도가 맞지 않지요. 왜 이러신 겁니까?

여기서 예수님의 진짜 의도가 드러납니다. 내려가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당해야 할 운명을 그대로 당하게끔 내버려 두신 겁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와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당해야 할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게끔, 그렇게 낮아져야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 있으니 내버려두신 것이지요. 예수님이라고 2일동안 마음이 왜 아프지 않으셨을까요? 지금 당장 도와주고 싶은데, 지금 가서 살려주고 싶은데, 예수님은 이들이 내려가야, 죽어야, 잃어버려야 하나님이 높여주시고, 살려주시고, 더 좋은 것들을 주신다는 것을 경험하게끔 하시기 위해서 이 문제의 정중앙으로 돌파하게끔, 하나님이 옳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게끔, 나사로가 죽도록 내버려두신 것이지요.  

나사로의 죽음, 예수님의 비통함, 조문객들의 슬픔.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행복하게 만든 인류가 이렇게 된 것에는 "죄"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진 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신에 대해서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과연 여러분의 신은 어떤 신입니까? 여러분의 병을 치료해주는 신? 여러분의 자녀대학입시를 책임지는 신? 여러분의 생활과 안정을 위하는 신? 결코 성경은 그런 신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철저히 여러분의 인생을 직면시켜 죄로 죽도록 내버려두시는 신입니다. 똑바로 바라보고 죄라는 문제를 피하지 않게끔 말입니다. 그 죄라는 문제 속으로 들어가 내가 도저히 헤어나 올 수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에 관심없습니다. 오히려 내 운명이라는 죽음을 가리려 합니다. 내가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가리고, 나를 증명하는데 애를 씁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을 설명하려고 하십니까? 여러분을 대표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나사로가 죽도록 예수님이 두셨던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죽지 않는한 예수님은 여러분이 지쳐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내버려 두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게 하시는 분이시지, 무턱대고 내가 원하는대로 살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소원을 들어주며 여러분을 살리시는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여러분이 죄 앞에서 죽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앞에서  쩔쩔매며 교만을 꺾고 하나님 앞에 오도록 하십니다. 



2) 영광으로 높아지는 인간, 이해못하는 인간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39절입니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따랐던 마르다조차도 4일이나 지난 죽음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인식, 사고, 주관은 "죽음은 되살아날 수 없다"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 앞에서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직면하고자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4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죽음의 냄새가 나고, 어두컴컴한 무덤안으로, 산같은 돌로 막혀있는 이 인생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면 하나님이 살릴 것! 그것을 이제 증명하고자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무덤 문을 열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낮아졌어도, 잃어버렸어도, 죽었어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다시 높아질 것을, 되찾게 될 것을, 살아날 것을!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내 인생이 내려가야 한다고, 죽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제 드디어 기도를 마치시고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십니다. 그리고 44절에서는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옳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옳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고 섬기는 신의 존재는 죽음에서 살리는 것을 "영광"으로 삼고 있는 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어야 그 신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죽어야 그 신이 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나사로를 부활시키러 갈 때 자기자신을 낮추지 못했던 등장인물들이 나타납다. 첫번째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를 살리러 유다로 가자고 하니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절)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야 한다고,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옳으심을 드러내러 가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과 절친했던 3남매 중 2자매였습니다.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부엇던 마리아, 그리고 그의 언니 마르다. 그 두 사람은 죽어서 부활할 것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나사로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한계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저 나중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 너의 삶 속에서 일어날 일이라는 것이지요.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현재 일어날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를 살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자들과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도, 예수를 그토록 사랑했던 2자매도 결국 자기자신을 포기하지 못하여서 예수님을 똑바로 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부활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살길을 줘도 죽음의 길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 길로 걷는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유명한 "나는 부활이자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여러분은 어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부활한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내 안에 그 부활예수의 영이 내 안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럼 오늘 지금 당장 내 안에 예수가 내려가면 하나님이 높여주시리라는 인생을 여러분은 살아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부활절이 끝난 이후 부활절을 계속 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자꾸 나를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도 높이 올라가고 싶어합니다. 나의 욕구, 자신감, 동기부여, 자기증명, 자아성취라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 결국 내 힘으로 살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높여주겠다고, 나를 믿으라고, 니가 할 일은 포기하는 것, 내가 할 일은 높여주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 영광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3) 부활의 삶으로
저희 딸 아이가 자꾸 하나님과 어떻게 만날 수 있냐고 묻습니다. 도저히 설명할 길이가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만날 수 있다, 기도하면 만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말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인생을 살아야, 인생의 문제과 밑바닥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찾아 갈 수 있습니다. 죽음의 인생을 경험하면서 생명을 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섣부르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현장, 묵상의 현장으로 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가 중고등부 사역을 할 때 한 청소년단체가 서울시광장에서 큰 집회를 했었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주강사로 하는 큰 집회였습니다. 그 단체 스텝임원모임에 초대받아서 한번 가보게 되었습니다. 외국목사님이 생수를 생명수로 바꿔주는 집회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회에 초대한 이들에게 정중하게 거절하고, 또 그 집회멤버가 제가 있는 지역에서 사역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너머 새생명의 과정을 보여주시면서, 너희도 이렇게 살아내라고 하셨던 겁니다. 예수가 그 길을 열어놓았으니 그 길을 살아낼 때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생긴다는 그 가장 놀라운 기적, 그 요나의 기적이 있는데 무엇을 더 우리가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적이나 환상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가 옳다는 것을 내 삶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숙여야 하는지를 배우십시오. 어떻게 내가 내 욕망을 죽여야 하는지를 묵상하십시오. 그렇게 내가 죽어가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를 높입니다. 지혜를 줍니다. 소망을 줍니다. 그렇게 나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옳음 안으로 초대해주십니다. 그것이 가장 큰 기적, 확실한 증거 아니겠습니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로 살아내는 것, 그 예수가 드러나는 삶. 그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요?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그 원리를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과 교회일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는 5-6월 동안 가정과 교회에서 성경이 말하는 섬김이 무엇인지, 진정한 공동체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통해서 배워보고자 합니다. 세분이 서로 섬김과 사랑으로 계시어 일체로 계시는 그 관계를 배워,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가정과 교회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가정과 교회를 경험할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로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 기간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는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섬김의 사람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아버지를 따라 탕자 둘째를 기다리는 첫째 아들의 섬김으로, 이미 나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히 여기는 품꾼이 되기를, 섬김으로 살았던 로마장군 백부장의 믿음고백으로, 사단의 시험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춘 예수님처럼, 자신을 개라고 부르셨던 예수님의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냈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러 내려가셨지만 다시 살리실 하나님을 믿으셨던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마침내 내 인생에서 예수가 드러나는 우리의 인생으로, 행복한교회에 예수가 수도 없이 드러나 세상인을이 이곳에 예수가 있다고, 예수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며 이곳이 구원의 현장이 될 수 있도록 한주도 작은 예수로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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