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몬 : 막7:24-30
제목 : 한보단 정으로 사세요.
1. 서론
1) 예화
지난 주 목요일이었습니다. 날씨가 좋아 아이들과 교회 1층 주차장에서 축구를 하며 놀았습니다. 신나게 외치고 소리치며 노는데 교회 근처 집에서 한 청년이 나오더군요. 저에게 가까이와 상기된 얼굴로 너무 시끄럽다고 말하더군요. 순간 올라오는 혈기가 있더군요. 그래도 어떻게든 참는 찰나 연재가 죄송합니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보고 저도 죄송하다고 말하고 아이들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인사를 다시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그 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사과 몇 개를 종이가방에 담아 노크를 하니 한 아주머니가 나오시더군요. 죄송하단 말씀을 드리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그 집 청년이 취준생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런 청년 자녀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눈시울이 금새 붉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라는 것을 소개하고 이웃으로서 기도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나서 돌아오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그 집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뒤짚힌 속은 진정이 안되었지만, 그 청년의 상기된 얼굴을 소화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 어머니의 자녀를 향한 안타까움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마터면 교회와 가장 가까운 이웃과 벽을 쌓고 항상 신경써야하는 원수가 될 뻔했습니다. 한맺힌 원수를 만들지 않고, 정으로 인사하는 이웃을 만들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 주제
욕망과 욕심으로 우리가 이웃과 만들 수 있는 것은 원수 밖에 없습니다. 힘든 세상살이에서 나의 이익과 유익, 안락을 지키기 위해서 이웃과 원수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나의 권리와 권한입니다. 이웃에게 마땅히 나의 요구를 말하는 것과 또 그에 맞서 내 주장을 한다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닐겁니다. 그런데 어제 경험해보니 원수가 되느냐 안되느냐는 참 종이 한장차이더군요. 그 과정과 순서가 어떻느냐에 따라 서로 한맺힌 사이가 되기도 하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정으로 사촌지간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참 다행스럽게도 종이 한장 차이를 다행으로 딸을 통해서, 그리고 목사라고 믿음으로 견딜 수 있게 해주신 은혜로 잘 살아낸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부활을 준비하는 주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이번 한 주 주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해 더 잘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여하는 것이 맞을까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와 같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방법과 같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이유와 목적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기 위한 고난이라면 그것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움의 한을 맺는 것이 당연한 이 사회에서 "함께 정으로 살아가기 위한 희생"이라면 예수님의 길에 부합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토록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죄가 있는 이 인간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함께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이번 한 주 예수님처럼 다른 이를 위해 내려가는 고통과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3) 본문잇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다른 이를 위해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 바로 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돈세탁 이슈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율법전통을 악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삼는 것에 대해서 질타하셨죠. 그 이후에 예수님은 한 여인의 인생을 두고 제자들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말씀까지도 변형시키고 전통을 악용해서 위로 오르려는 인생이 아니라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이죠.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한 사람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려간 인생이 바로 예수님의 인생이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내려가야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에는 가나안 여인,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여인이라고 소개된 그 여인과의 일화입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이번 한주 예수님을 따라 이웃을 섬기러 내려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고난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예수님의 시험
오늘 본문의 배경부터 살펴보죠. 24절입니다. "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님의 거처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그곳에서부터 두로라는 지방까지 오신 것인데, 50km거리로서 걸어서는 하루이틀길이었습니다. 간단한 거리는 아니지만 또 가야할 목적이 있었다면 마음먹고 갈 수 있는 거리죠. 예수님은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을 데리고 두로까지 오셨습니다. 그런데 두로는 외국지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혐오하던 이방인이 사는 곳이었고, 게다가 두로는 "우상신전"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하반절에 보니 "아무도 모르게" 머물고 싶으셨습니다. 제자들 양육만 하고 돌아가고자 했던 목적입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신다던지, 대대적인 사역을 하시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은 "이스라엘인"을 위한 것이었지, 결코 "비이스라엘인, 그러니까 외국사람"들이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숨길 수는 없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명이 25-26절에 등장합니다.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먼저 여성이라고 밝힙니다. 그 다음 헬라인, 그러니까 비이스라엘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외국인, 이방인,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지요. 그리고 수로보니게, 그러니까 수리아-페니키아 족속이라고 인종을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고대 사회시대상황에서 볼 때 남성 유대인과 여성 이방인은 결코 따로 만나기 어려운 관계임을 설명합니다. 고정관념상 사회적교류가 이뤄질 수 없는 관계죠. 그런데 이 여인이 가지고 온 문제가 더 기가 막힙니다. 하반절을 보니까 "자기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또 다른 이방 여성의 문제였기에 그 집으로 가야만 하는 문제였고, 물리적인 문제나 질병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인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합니다. 여러모로 유대남성인 제자들이 보았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산적한 이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데리고 오셨는지 당장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보입니다.
힌트가 있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에 고르반논쟁입니다. 서기관들이 만든 전통 중 하나입니다. 부모를 모시던 사람이 자신의 재물을 고르반으로 지정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으로 취급합니다. 그럼 그것은 그 어떤 목적에도 쓸 수 없습니다. 단 한가지 예외는 "급박한 실생활"을 위해서는 쓸 수 있었습니다. 헌금하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먼저라는 좋은 전통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악용하여 유대사회에서는 부모님을 섬기는데 자신의 재산을 쓰지 않으려고 재산을 고르반으로 넣어놓고 급박하지도 않은 자신의 실생활비용으로 쓴다는 겁니다. 종교제도로 우회시켜 부모에게 자기 재산이 가지 않도록, 그러니까 돈세탁 용도로 이 제도를 쓰는 것이었죠. 예수님은 이것을 지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16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부모를 섬기려 낮아지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의 못된 욕심이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너희가 만든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고 사람이 더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반박하셨던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전통들을 지키지 않아 인간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이미 더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 반대를 보여줄까? 너희가 보기에 더럽다고 말하는 우상신전 근처에 살고 이방인에다가 여자인 그리고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자를 만나러 가보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가보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 여인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과연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장 큰 말씀 십계명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생활을 높이려는 이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2) 낮아지는 인생, 고백하는 믿음, 높여주시는 하나님
본문 2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이런 여인의 요청이 있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마태는 조금 더 자세히 적습니다.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15)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러 오셔놓고도 애써 모른척 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를 보내소서" 그러니까 "그 요청을 들어주시고 얼른 보내시지요"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모른척하십니다. 여러분이 이야기의 결론을 아시다시피 결국 예수님은 여인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해주지 않으셨던 겁니다. 이 여인을 계속 시험에 빠뜨리셨던 의도가 있으셨던 것이지요. 27절입니다.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켜도 자녀,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 유대인에게 먼저 베풀어져야지 왜 이방인에게 베풀어져야 하냐고 반문하십니다. 거기다가 그 은혜로운 기적이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하시며 이방인이자 여인을 "개"라고 칭하시면서 모욕까지 베푸십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고민이 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는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베푸시는 건 머리로는 이해가 되겠지만, 사실 당사자가 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바로 고쳐주셔도 힘든 인생인데, 지금 응답해주셔도 힘든데 왜 이러실까요?
하나님을 보나 세상을 보나 힘과 이성, 상식으로 인생을 대할 때 우리는 결코 인생문제들을 풀어낼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이 이방인으로 태어나고 싶었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녀가 귀신들리길 원하겠습니까? 자신이 원치 않는 이해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여인은 세상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세상의 힘을 뛰어넘는 신의 개입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신이라고 해서 예수를 직접 만났더니 더 시험에 빠뜨린다니요. 당장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라고 쉬운인생이십니까? 내 자식이 귀신들린 만큼 힘든 것은 아니지만 각자가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고 갑니다. 그게 너무 힘듭니다. 때로는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냥 모른척하고 나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각자는 인생의 역경 속에서 너무나도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미치기 전에, 세상과 등지기 전에, 정신줄을 놓기 전에 얼른 신의 개입이 필요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 여인이나 우리네 인생이나 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 기도에 쉽게 응답해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당장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요즘 너무 힘들다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 멘토 목사님께 고민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경험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마음을 주셨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기도를 안들어주시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럼 나는?"" 문제만 해결되면 나와 너와의 관계는 뭐가 남느냐? 우리관계는 이렇게 너의 성공에만 매달린 관계냐? 우리의 진정한 관계는 무엇이냐라는 말씀였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여인에게 그런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을 흔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믿음의 시험을 통해 더 믿음을 훈련시키고 단련시키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딸을 낫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인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견고한 믿음의 관계를 위해 시험을 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시험 3가지를 보면서 하나님 보다 낮아지는 인생이 될 때 하나님이 높여주신다는 원리를 예수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낮아질 수록 예수님과 우리는 더 견고한 믿음의 관계, 신뢰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예수님은 여인을 더 높이고자, 더 낮추시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일화에서 예수님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낮아지는 시험은 나중에 더 높이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이심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당하고 고난당할 때 결코 믿음을 놓치시면 안됩니다. 반드시 우리를 구해주실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보고 깨닫게끔 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라오는 자가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를 말이지요. 하나님이 높여주는 인생을 살려면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 말이지요. 유대인들은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 부모공양하는 것도 아까워하며 성전전통규칙을 만들어 돈세탁을 해대지만, 이 이방여인을 보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원리, 예수님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밑바닥을 찍는 이 인생이 어떻게 높아지는지 보고 너희도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낮아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3) 성육신
제가 서두에서 한과 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한으로 사는 인생과 정으로 사는 인생. 어떤 인생이 되길 원하십니까? 한 맺힌 인생으로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하는 냉혈한의 인생을 살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따스하고 온정이 넘치는 정으로 사는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오늘 귀신들린 딸의 어미는 하나님의 정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정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험에 기꺼이 들어갔습니다. 낮아지기로 엎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가 29-30절에 나타납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사단은 예수님께 엎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할 것"을 말씀하시며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쳤고, 그 결과 사단은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그 고백이 이 여인의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면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나 사단에게 엎드리면 옭아맵니다. 억압합니다. 짓누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엎드리고 계십니까? 무엇을 향해 경배하고 계십니까? 어떤 것을 위해 낮아지고 계십니까?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단은 예수님에게 엎드리라 말하면서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과 인류를 섬기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더 낮은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성육신"하는 것을 막을 겁니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타인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나만의 상황, 나만의 감정, 나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 한맺인 인생이 되어서 결코 타인을 향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재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번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합시다. 더 낮은 자리로 가서 낮은 사람이 됩시다. 한말고 정으로 살아냅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탕자 둘째를 같이 품을 수 있는 첫째 아들이 됩시다. 내가 가진 은혜와 영적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깨달아 그것을 가지지 못해 세상에서 짓눌려 있고 억압당하고 있는 탕자들에게 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 주님 곁에 갔을 때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해주실 겁니다.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3. 결론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낮아질대로 가장 낮은 곳에서 섬겨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피가 내 인생에 흐르고있음을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고난에 동참하는 신청서를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기도하면서 그것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어떤 틀에 가두는 것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한주 예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낮아지시고 고난당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여러분 주변 사람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낮아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더 낮아질 수 있는 시험을 주실 때마다 그것이 더 높이시려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낮아질 때마다 내 인생이 주변 인들과 함께 천국이 되어갈 수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육신과 영혼과 인생에 예수의 피와 은혜가 흐르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지친 그 사람에게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의 커피믹스 한잔 하며 근황을 묻는 시간에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말 못한 속내를 꺼내며 위로를 바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소 한 번에 삭막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이번 한주 작은 예수가 되어, 이세상이 보기에 곳곳에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사랑이 곳곳에 피어나는 참된 부활절을 만들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5MIgWgKwc
'주제설교 > 절기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절08. 드러나는 예수 (0) | 2022.04.19 |
---|---|
부활절07. 짐이 되는 사람, 짐을 짊어지는 사람 (0) | 2022.04.16 |
사순절05. 맨손으로 승리하세요. (0) | 2022.04.01 |
사순절4. 인간미 넘치는 천국 (0) | 2022.03.25 |
사순절3. 내려오세요. (0) | 2022.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