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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주제설교/주일설교

롬 15:1-7

by 우루사야 2021. 9. 24.

본문. 롬 15: 1-7
제목. 서로 주고받는 신앙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3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1. 서론 
1) 예화 
오늘은 공감이라는 것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두 가지 공감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하는데 첫번째는 자기공감입니다. 요즘 같이 코로나로 인해 활동영역이나 경제영역이 좁아지자 우울해하는 자기자신을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공감이 지나치게되면 자기합리화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삭개오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자기자신에게 극단적으로 공감한 나머지 키작은 컴플렉스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의 것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배로 힘들어하는 동족의 재산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삭개오는 자기공감을 너머 자기합리화로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채우고자 했습니다. 코로나처럼 재난 때에 자기공감이 극대화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사재기입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만 또는 내 영역에게만 해당될 때 이렇게 이기적인 상황에도 사용될 수 있는 단어가 됩니다. 
두 번째는 외인공감입니다. 내 영역 밖으로의 공감이죠. 재난 상황에서 사재기 뉴스 다음에 보이는 뉴스들은 자신의 영역 밖의 사람들을 돌보는 자들의 소식입니다. 이번 코로나로 미국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주권 신청 중이거나 서류가 미비되어 혜택을 받지 못한 한인들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한인 독지가가 3만달러를 기부하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연이 전해지자 또 다른 한 분이 3만달러를 기부했고, 그와 같은 기부자가 계속해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뉴스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공감이나 외인공감이나 재난의 상황 속에서 섞여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 마음 속에도 이 두가지가 모두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2) 주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두 가지 이미지를 대비시키는데, 방금 말씀드린 자기공감과 외인공감과 비슷합니다. 1절입니다.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그러니까 이웃을 기쁘게 하는 자로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가 로마서를 계속 다루면서 집중했던 것이 바로 "나의 고집"입니다. 자기공감과 자기합리화에 가득찬 현대인의 우울감은 자신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만듭니다. 그 늪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시야를 밖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공감해주는 것보다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공감하고 계시다는 복음을 믿고, 나에게만 공감했던 것을 외인에게 공감하며 나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기영역확대야말로, 나의 고집을 뛰어넘어 복음의 인생을 사는 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흘러내리고, 나로부터 타인에게로 흘러가는 공감의 연속, 사랑의 연속은 마치 낙수효과 같이 보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내리사랑으로 건강한 공동체는 세워집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먼저 복음을 깨달은 자는 나중에 깨닫게 된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길이며, 이웃을 사랑하되 특히 공동체원을 섬기는 길이고, 이것으로 교회는 성숙해지죠.

3) 본론잇기
코로나를 통해서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기도 하고, 또 새롭게 출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코로나 이후를 맞이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로마서의 결론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어떤 교회가 되야 할것인지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깨달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 포스트코로나 속에서 행복한교회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1) 자기를 기쁘게
바울은 본문 1절에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말하고, 3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 지으면서 왜 이렇게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해 계속 주의를 주는 것일까요?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힘을 측정해보고 싶어합니다. 그런 점에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두고 "자신의 힘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욕구"라고 표현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휘두르고 확인하고 측정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사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인간의 욕구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1장)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휘두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허락하시지 않으셨던 능력이 있는데, 바로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이었습니다. 악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통해서" 만이 가능했습니다. 즉 선악분별에 있어서 아직 아기와 같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와를 이렇게 속입니다.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능력을 가지게끔, 그것이 하나님이 금지한 것일지라도 가지고 싶은 욕망이 들게끔 사단은 하와를 꼬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결국 꼬임을 선택했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것이죠. 사단의 꼬임은 "하나님 말씀은 거짓말이다! 너희는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러신거다!"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판단도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고,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조물주이신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경배하고 섬기는 존재가 바로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인간, 그래서 선악을 판단하고자 했던 인간, 그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했던 인간.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이 했던 행동이지요. 율법만 지켜내면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이라고 믿었고, 이것이 선이며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악이라고 제멋대로 분별했던 것이 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이 우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나의 입장이 괜찮아 보이고, 이걸 준비해 놓으면 그래도 세상에서 어느 정도 준비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의 삶에 대해서 선-좋음과 악-나쁨을 구분짓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조물주보다 피조물인 자기자신을 더 높이 두어 스스로 판단하고, 그 삶을 계속해서 영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합니다. 


2)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의미부여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바울은 우리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전에 기록된 바", 즉 성경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위로와 소망을 찾을 수 있는 존재로 의미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부여가 없을 때 우리는 두 가지의 상황으로, 의미를 찾기 위해 돌변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동물과 다름 없는 인생이 됩니다.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 18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19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전3)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부여가 없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출발과 죽음이라는 마지막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과 성령이 없이는, 우리는 포유류이며, 침팬지와 유사한 골격을 갖는 동물일 뿐이며, 그리고 동물과 같이 죽음을 앞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미부여가 없을 때 인간이 보이는 행동 두번째는, 소유로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는 겁니다. 즉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특히 인간은 내가 가진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게끔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물질에 대한 소유와 소비로 단순하게 생각해보기 보다는, 첫번째처럼 동물을 통해 생각해보죠. 
요즘 세계에서 많이들 이슈화가 되는 것이 "동물의 권익", 즉 동물보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물보호법을 통해서 동물이 최소한으로 가져야 하는 권익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교류가 이뤄지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2 사건이 기억이 납니다. 19년도 고성산불이 일어났을 때 반려견을 구조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번 아프가니스탄을 삼킨 탈레반을 피해 사람들이 비행기에 매달려 도망치고 있을 때, 아프간에서 동물보호소를 운영하던 폴 파딩이라는 사람은 펀딩을 통해 전세기를 빌려 개 100여마리, 고양이 70여마리는 태웠지만, 아프간 동료들은 태우지를 못했습니다. 이에 아프간 참전용사인 톰 투겐트하트 하원 외무 특별위원장은 인터뷰에서 "공항으로 사람들을 데려와 탈출시키는 게 어려운 상황에서 개 200마리를 데려오는데 많은 병력을 사용했다. 반면 내 통역사의 가족들은 살해당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이어 "통역사 한 명이 며칠 전에 '왜 5살짜리 내 아이가 개보다 가치가 작냐'라고 물었다"고 덧붙였다고 합니다. 그럼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우리는 동물을 소유하여 반려견 또는 반려묘를 소유함으로써 어떤 의미를 가지는 존재가 되는 겁니까?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생명과 비교해서 동물을 택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게 됩니까? 이런 실례는 요즘 반려견이냐 사람이냐, 누가 먼저냐라는 실생활에서의 많은 사건사고로 우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동물을 소유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로서 의미를 가지기에, 인간보다 동물을 택하게 되고, 나의 삶보다 동물을 케어하는 삶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까? 과연 폴 포딩은 자신의 인생에 동물을 통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직도 세상은 난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보니 인간이나 동물이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헛되니 같은 입장이라는 겁니다. 반대로 현대인들은 인간과 같은 의미를 동물에 부여함으로써, 특히 자신이 가지고 소유하는 동물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동물과 같은 입장이 되고자 합니다. 그렇게 인간의 의미는  아무 의미가 없거나 보잘것 없는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그 끈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지점에서 한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진리를 선이든 악이든 무엇으로든 바꾸어버릴 수 있는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을 택해 나의 삶의 의미로 진리로 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 스스로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나를 공감한다는 명분 아래 나를 합리화시키고, 나의 생을 그것에 매이게 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억압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율법주의가 그러합니다. 내가 만든 종교와 진리, 내가 선택하고 싶은 신앙생활로 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멀리합니다. 그것이 앞에 주어졌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아둔하여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하나님의 의미부여
먼저 바울은 성경이 무어라 말해준다고 합니까? 3절 하반절에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해줍니다. 좀 더 쉬운 번역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나머지 하나님을 향할 것들을 대신 받는 것이 의인이 살게 될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섭리를 만드셨고, 성경은 예언하였으며,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내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때문에 고난받는 인생은, 나 자신을 위해 또는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사는 것보다 의미가 있는 인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3절입니다. 

3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 하셨고, 예수는 그렇게 섬기며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셨다면 꼭 그렇게 사셨을 법한 인생을 예수님은 살아내셨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섬기었던 삶, 나를 구하기 위해 섬기셨던 그 삶입니다. 그 구속을 받고 가지고 있는 자는 그럼 예수를 따라 어떻게 살겠습니까? 2절입니다. 

"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우리가 위에서 의미부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에게만 의미부여하고 공감하는 삶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이웃과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해줍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무언가 남기고 싶으시죠. 사실 우리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의미있는 인생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선과 덕을 남기라고 말해줍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고. 

내가 나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생, 잘했다 칭찬해주실 인생, 심판대 앞에서 옳은 인생이라고 해주실 인생. 복음으로 살아낸 인생. 믿음으로 살아낸 인생. 그것은 무엇을 이룹니까?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냅니다. 영어성경은 선을 for his good, 덕을 build him up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웃이 평안한 상태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가 다시금 믿음을 증진시키고, 삶을 세워나가며, 생활에 힘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말이죠. 내 인생에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 무언가를 소비하고 가지지 않고, 타인의 인생이 의미가 있도록 했을 때 우리의 인생에 의미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자는 예수가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의미있게 해주셨기에 타인의 인생에 관심을 둘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 행복한 교회가 포스트코로나를 맞이해서 어떤 모습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복음으로 준비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선과 덕을 이루고 세울 것을 말이죠. 5-6절로 이어집니다.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렇게 복음으로 살아내는 교회를 향해 하나님은 인내로서 기다려주십니다. 이 사역에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십니다. 그리고 곁에서 위로로 힘내라고 격려해주십니다. 교회의 부흥이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교회, 우리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 교회는 예수가 머리되시어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본받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뜻이 통일이 됩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랑이 되기 위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4) 서로 받으라 
요즘 난리가 난 한국드라마가 있습니다. 오징어게임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인데 상금을 걸고 경쟁자들을 무찌르는 내용의 줄거리입니다. 그래서 내용이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는 대답에 주연배우 이정재씨가 이런 대사를 합니다. "원래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믿는 거지." 드라마에서는 서로 경쟁하고 죽고 죽이는 상황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는 관계가 생기고, 신뢰가 싹트기도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조건 속에서도 또 평상시에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믿을 대상이 필요해서 믿기도 하고,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 믿기도 하고, 내 안에 복음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강력한 마음을 주기 때문에 이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이 욕망으로부터 시작했을 때 드라마 오징어게임처럼 누구든지 뒤통수를 맞고 발등이 찍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확실한 출발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웃에 대해서 이렇게 7절에서 말해줍니다. 

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받음이라는 단어가 두번 나오는데 바스티죠, 영어성경은 bear로 번역했는데  너그럽게 보아주다 동사로 해석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너그럽게 돌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교회 안에서 섬김을 받으며 강건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믿음이 연약한 자는 하나하나 신앙에 대해 더 건강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교회는 좋은 모습, 질서가 있는 덕이 있는 모습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기때문에 우리가 서로 받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희생은 의미가 있었고, 그 후에 놀라운 영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본받아 깨달은 복음이 주는 확신과 기쁨으로 이웃을 섬겼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계속해서 일치된 질서 안에서 우리의 교회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머리에 계신 예수를 본받아 우리가 그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럴 때 6절에서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을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받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렇게 한 뜻과 한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예수의 머리 아래에서 한 지체가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일치됨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해주셨습니다.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

하나님이 섭리로 만들어 놓으신 섬김의 내리사랑.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이었고, 세분 중 한분 예수가 직접 인류의 대표가 되시어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지체가 되시고 형제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와 한 몸이 되어서 삼위 일체 하나님의 교제 안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놀라운 사실이지요!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위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지난 번에 타교단의 큰  원로격이신 목사님께서 소천하셨죠. 그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정말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 가슴을 참 아프게 하는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타교단의 교수님들과 목사님들이 그 돌아가신 목사님들 조소하고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천국을 갔는지 지옥을 갔는지 말하면서 말이죠.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어쨌든 그분의 일대기를 읽어보면 복음의 구령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치신 분입니다. 인생말년에 대해서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삶의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입장에 서게 된단 말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받는 것입니다. 순복음교단을 받고, 그 지체들을 받는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 교회를 위해서, 다시 복음의 열정으로 세워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조소와 조롱이 아니라 서로 받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성숙해져가는 것이겠지요. 가면 갈 수록 더 극단적이고 집단화되는 기독교 신앙모습 속에서 우리는 결코 속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진리를 지키면서도 서로 사랑하기를 그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예배 인원이 많아졌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요. 코로나 상황 속에서 많은 교회의 담임목사님들이 40-60% 정도 신자가 감소했다고 조사가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수치입니다. 우리교회도 많이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이 있으며, 영혼에 갈급함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섬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강한 믿음을 가진,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랑하시고 영광받으시는 모습입니다. 

 

3. 결론 
1) 예화 
둘째 딸과 대화를 하다가 날개를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냐고 물으니 하나님과 천국을 보고 싶어서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렇구나 좋구나! 대답해주고 말았습니다. 아이에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과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알려주긴 했지만, 그것을 저절로 깨달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 때의 역할이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이 강한 자가 우리교회에 많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자들을 품어내며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기다리며 함께 기도해줄 수 있는 자들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첫째 아들이 탁구를 치러 친구들을 자꾸 교회에 데리고 옵니다. 4명정도가 모였습니다. 그래서 탁구교실을 열려고 이전 사역지 청년에게 연락을 해봤습니다. 기꺼이 섬기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친구가 주일학교에 오고 싶다고 하더군요. 부모님께 허락받으라 했는데, 바로 옆에서 가라~제발 좀 가라! 소리가 들리더군요. 

둘째를 통해서 믿음이 강한 제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배우게 됩니다. 첫째를 통해 아직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계속 배울 수 있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편견과 고집으로 가득차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뛰어 넘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든 어떻게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넓은 믿음의 지경을 믿으며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 배우며 서로 섬기길 소망합니다. 

포스트코로나입니다. 코로나로 교회가 문을 닫았던 시간이 이제 점점 끝나갑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여전히 있으며, 영혼에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들 또한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나 스스로 인생을 구원해야 겠다는 불안과 초조한 인생계획을 내려놓고 복음으로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먼저 깨닫고 믿음이 강해진 우리는, 하나님이 그 다음으로 부르시는 이제 믿음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부르실 것을 기다리며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이 준비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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