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분별하는 새로운 삶
본문. 로마서 12장 1-5절
(개역개정)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1. 서론
1) 예화
오늘은 추석, 가을 중 가장 좋은 저녁, 그러니까 달빛이 가장 좋은 날이지요. 추석을 맞이해 달 이야기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밝은 달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저도 추석이면 아버지의 고향 고흥에 내려갔기에 가로등 없는 어두컴컴한 시골 밤길도 보름달 빛으로 환하게 비출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예술가들은 어두운 환경 속에서 그리는 사랑이야기를 보름달 뜨는 저녁이미지를 사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절한 사랑꾼이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던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환상풍의 소나타 1악장을 루체른 호수에 뜬 달빛이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젊은 분들은 즐겨 보셨던 아이유 주연의 호텔 델루나도 죽음이라는 슬픈 주제를 가지고 사랑을 말하고자 하면서, 루나라는 그리스로마신의 이름을 따오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이름도 장만월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가운데 소망을 그립니다. 잘 안보이는 것을 잘 보고 싶어합니다.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힘이 날 수 있는 동기부여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두운 가운데서도 달빛을 고대합니다.
2) 주제
우리 구원의 주제로 같이 이야기해볼까요.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밤과 같습니다. 온갖 문제와 트러블, 오류, 모순, 역경, 혼돈으로 가득차 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이유를 찾습니다. 인생을 더 살아보신 여러분께서 잘 아시겠지만, 인생을 살아갈 이유라고 해서 어두웠던 방이 갑자기 밝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기적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어두컴컴하지만 촛불 하나만 있어도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빛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어디에 있고, 얼마만큼 기다려야하며, 어떻게 살아가면 될런지에 대해서만큼만 알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소망을 뺏으면, 야수가 되어 먹이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인생은 어둡습니다.
그 인생에 하나님은 무엇을 주시고자 하실까요? 요한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빛"으로 계시를 받거나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 이후는 어둠 속에 있던 우리가 빛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건 죽음 이후이고, 현재 어두운 곳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복음을 가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조용하고 어두운 시골어귀를 만월빛으로 걸어가는 인생"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냥 신날 수는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논두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보름달빛으로 길을 잘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두운 인생길 잘 걸어오라고 주신 복음의 빛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두운 것인지 밝은 것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인생길, 그 길을 함께 잘 걸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사는 새로운 삶은 "생각이 가능한 삶"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을 분별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냥 어두운 길을 걷던 인생이었지만, 복음은 그 어두운 길에 가장 밝은 달빛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달빛은 언젠가 햇빛이 올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 밤이 지나면 말이죠. 그래서 이 밤에 가장 밝은 달빛은 우리가 잘 걷게 해줍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어떻게 가야하며, 어떤 상황에 걷고 있는지 말이죠. 복음은 그렇게 우리를 명확하게 해줍니다. 분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3) 본론잇기
오늘 본문은 로마서의 전환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1-11장까지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자신이 이상한 전도자가 아니라 "예수를 직접 만난 사도"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이 얼마나 성경적이고 건강한 것인지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그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하면서, 목회자로서 자신이 어떤 삶을 지양하고 또 기독교 공동체를 어떻게 인도하는지 말하고자 합니다. 그 중심에 "분별하는 새로운 삶"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지요. 공동체에 대해서, 나라의 공직자에 대해서, 원수에 대해서, 믿음이 약한 자들에 대해서였음을 여러분이 지난 주에 큐티하셔서 아실 겁니다. 다음주에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으로 분별하는 삶에 대해서 다루게 됩니다. 우리가 이제 9월 다음주까지만 로마서를 살펴보고, 10월은 큐티집을 따라서 예레미야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사는 새로운 삶, 분별하는 삶을 깨닫고 은혜가 가득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혼돈을 살아가는 인류
(1) 분별하지 못하는 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21) 여기서 마음이 둔해지는 요인을 방탕, 술취함, 생활의 염려라고 말해주십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 주에도 아둔함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심령이 둔해지거나 탁해지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별하지 못했을 때에 덫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마지막 날에 말이죠. 회복이 불가하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같은 의미로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을 말하는 이 세대를 바울은 왜 본받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2절 하반절에 힌트가 있습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b)
이 구절을 반대로 생각해볼까요? 이 세대를 본받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첫째 마음에 새로움이 없습니다. 둘째 마음에 새로움이 없으니 나의 변화도 없습니다. 셋째 이 세대를 본받으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정리해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를 못해 자신의 성화로의 변화가 없는 정체되어 있는 자를 뜻하게 됩니다. 생활의 염려와 방탕함, 술취함으로 내 사고는 고정되거나 퇴화되어, 고집과 아집으로 가득차게 되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염려, 그리고 이 세상이 주는 방탕함과 나를 혼미케 하는 술취함과 같은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추석연휴를 맞이해서 나오는 기사들 중에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추석방문으로 살펴봐야 할 부모님 치매초기증상"과 같은 제목을 가진 기사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꼭 어르신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의 행동양상도 봐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이나 중년이나 가장 큰 어려움은 "자신을 드러낼 시공간"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사회활동을 통해서 찾아야 하는데, 그 기회가 없으니 자꾸 자신의 방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이지요. 늦은 취업, 이른 은퇴, 쉽지않은 자영업, 준비되지 않은 노후 등 사회에서 내가 드러나기 위한 환경의 부재는 우리가 자꾸 움츠려들게끔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장기화되고 연속적이게 되면 정신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가 여기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병리학적이고 정신과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의 환경은 자꾸 우리의 생각이 움츠려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활에 대한 극심한 염려와 무리한 삶의 스트레스로 인한 여타 다른 것들에 대한 과도한 의지 및 중독증상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포기하는 자들이 보이는 증상이라면, 후자는 극심한 불안정이 나 자신을 내몰게 만들고, 그래서 다른 것을 의지하게끔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부르는데, 중독의 사전적 의미는 "1.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 2.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 3.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술, 담배, 마약 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사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말해주는 것이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와 미다스 왕의 이야기입니다. 디오니소스는 풍요의 신 또는 포도주의 신입니다. 자신의 스승을 잘 돌봐준 미다스 왕에게 소원을 하나 말하라 합니다. 그래서 미다스 왕은 자신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바뀌게 해달라고 합니다. 천하의 부자가 될 환상에 미다스 왕은 자신의 왕궁기둥, 식탁을 금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이 먹을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는 굶어 아사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이 재앙을 낳은 꼴이 되었죠. 자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본 미다스는 강에 가서 물로 씻으라는 메시지를 통해 미다스의 능력이 강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그 결과 그 강에는 사금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염려를 채울 풍요, 술취함을 채울 포도주, 그 두가지가 가져다 주게 될 방탕한 삶. 그것은 우리를 더 옭아 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의 생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우리에게 직접적인 이야기들로 가볼까요? 마음의 새로움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계속해서 제가 말씀드린 나의 경험, 감정, 생각, 지식에 갖혀 나의 판단으로 고여, 하나님과 함께 할 틈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나의 신앙이 만들어낸 구원에 취해, 가짜 은혜의 물이 고여 썪어 그 안에 생물이 죽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으로 갇혀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무덤과 같은 마음과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생동력이 없으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고, 말씀과 예배 속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며, 성령 하나님과 동행은 생각도 하지도 못하는 신앙 속에서 내가 아는 성경해석, 내가 경험한 신앙생활, 내가 얼핏들은 신앙규범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새로운 것이 없는 그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3절입니다.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 세대를 본받는 사람들은 이상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니님께서 나눠주신 믿음만큼 안에서 생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다는 것이지요. 생각할 것을 생각하고 그 이상이 아니라 생각할 것을 하지 않고 다른 것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버린 채, 다른 것에 위안과 위로를 찾으려 하는 것.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나를 버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인생을 포기했던, 아니면 극복하고자 과도하게 노력을 했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 생각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머리
(3) 하나님의 뜻
한 때 한국개신교계에서는 "영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신약 오늘 본문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단어가 많이 오용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가 "영적"이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분별하지 못하는 인생이 아니라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에 대해서 말이죠. 유튜브에서 분별이라고 검색을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많은 양의 영상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이 "영적전쟁"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어떻게합니까? 불교사원에 가서 통성기도를 하고, 이슬람국가에 가서 순례전도 7바퀴를 돕니다. 2000년대 한국의 무지한 전도방법들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영적전쟁이라는 말자체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는 영적이라는 의미는 "삶 또는 생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대표적으로 아는 영적전쟁을 묘사하는 에베소서 5장 하나님의 전신갑주표현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으로 준비한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이것이 모두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살아가며 사단과 싸워 이길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에서 말하는 영적 예배도 그러합니다. 바울은 몸과 마음을 말하면서 나의 생활에서 이뤄질 영적예배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서 등장하는 것이 너희 몸이고 2절에서는 마음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드리는 무언가"가 아니라 "드리는 주체, 그러니까 드리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더 원하신다고 우리는 사무엘서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드리는 사람이 "살아있는 제물", 그러니까 무언가 희생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2절에서 마음은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지요.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한 분별을 하게 됩니다.
복음은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단순함이 삶의 각 영역에 적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3절에서 그 복음에 대해 무어라 바울은 설명합니까?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해줍니다. 여기서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이 받은 양"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베이스"를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신앙이라는 집을 세우기 위해 토대를 주셨으니, 그 안에 지으라고는 것이지요. 우리 심령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은 우리의 신앙의 견고함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 견고함으로 결국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게 됩니까? 5절입니다.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믿음의 베이스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한 몸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그 교회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분별하고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4절에서 한 몸이 될 때 복음은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게끔 해준다고 말해줍니다.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믿음의 분량을 하나님이 주셨다면, 각 사람에게 은사와 독특한 삶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성도에게 주신 부모와 자녀들, 삶의 환경들,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들, 삶의 십자가들을 바라보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교회가 되어갑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빛은 있으나, 아직 우리의 인생길은 죄와 사단의 위협 속에서 언제든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떨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하고 있는 주님의 빛은 언제나 그대로 가장 밝게 우리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더 밝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이들 때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인생을 이끌어가시는지에 대해서,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밝은 빛을 주셨으면 하는 심정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한 어두운길, 충분한 달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믿음의 발걸음"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마지막장에서 묘사하는 모세의 죽음직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7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깨어있길 소망합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사단에게 지지 않고, 복음으로 승리하며,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과 깨달음, 소망, 확신 속에서 우리의 삶이 가득할 줄 믿습니다.
복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길 소망합니다. 어둡다고 눈을 가리지 마시고, 나의 고집을 내리고 내 손을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주님의 인도하심, 주님의 빛이 보입니다. 우리를 향한 구속과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세상을 따라 경주하던 것을 마치고, 주님의 빛을 따라 인도하심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번 한 주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분별하시고, 주님의 도우심 아래서 지혜를 가지고 한 발걸음씩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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