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럼에도 살아지는 인생
본문 : 요15:23-27
23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1. 서론
1) 들어가기
이제 21년 4/4분기로 나아가는 첫번째 주입니다. 한해를 잘 정리할 수 있는 이번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까지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에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리 주일학교 친구들과 중고등부 친구들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가지고 공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님과 제가 목사안수를 받을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가지고 목사 안수를 받는데 이 고백서와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입니다. 이번 분기 동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순서를 따라서 함께 주일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자녀가 있으신 분들은 함께 설교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2) 예화
여러분 피로하시거나 운동을 무리하게 하실 때 가장 먼저 뭉치고 아픈 곳이 어디입니까? 파스붙이는 곳 생각하시면 됩니다. 네, 바로 승모근, 어깨근육입니다. 그런데 이 근육이 피로해서 뭉치는 것은 이해하지만, 운동을 하는데 왜 이곳이 뭉칠까요? 제가 이래뵈도 축구, 탁구, 테니스 못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운동에 일가견이 있는데, 자세가 올바르지 못한 상태로 운동을 하면 근육이 이렇게 뭉치기 마련입니다. 정자세를 가지고 운동을 하면, 뭉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할 때 잘하시는 분들은 격한 몸싸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스텝과 물흐릇이 휘두르는 스윙, 딱딱 맞는 스텝을 가지고 힘들이지 않고도 잘 하십니다. 그게 담임목사님이셔요. 어쨌든 운동을 할 때 힘을 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뭉치지 않습니다.
힘을 빼고 자연스러운 동작, 그게 운동을 배울 때 관건입니다. 운동을 하다보면 인생의 원리를 배울 때가 많은데,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힘을 빼야" 잘 살아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힘을 주고 다닙니까? 거창한 계획, 첫 술에 배부르려는 사람, 합리적이지 않은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이런 분들이 힘을 주고 살면 분명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제가 어떤 분의 글을 봤는데 이런 신념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기관리를 하자. 죽을 각오로 목숨을 걸고 무언가 해내면, 그 다음엔 더 죽을 각오로 목숨을 걸어야 성공한다. 그래서 힘을 빼고 성공할 줄 알아야 한다. 단 하루만 살듯이 살기보다는, 죽을만큼 노력하기보다는, 죽기 싫을 만큼 노력하자."
'자연스러운' 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검색해보았습니다. 자연스러운의 사전적 의미는 "1. 억지로 꾸미지 아니하여 이상함이 없다. 2. 순리에 맞고 당연하다. 3. 힘들이거나 애쓰지 아니하고 저절로 된 듯하다."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는 법을 말할 때, "물흐르듯이"라는 표현을 빌어서 쓰기도 하죠. 억지로 살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순리에 맞게 이상하지 않게 저절로 살아지는 것. 우리가 어떻게 꾸며서 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살고 싶은 인생이 무엇입니까? 힘들이거나 애쓰지 아니하고 저절로 되는 자연스러운 인생 아니겠습니까? 이 사전적 의미 아래에 가장 많이 검색되는 것은 외모가꾸기에 대한 글들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화장법, 자연스러운 성형, 자연스러운 톤업 등이 보이더군요. 인위적인 꾸밈의 정점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힘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3) 주제
우리는 나 자신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서 온갖 힘을 주고 살아갑니다.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복음은 그 힘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이미 널 인정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요. 하나님이 인정하셨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집니까? 어깨에 힘을 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과 수치와 아픔, 인생의 쓴맛을 보신 분들은 더 잘 아실 겁니다. 내 힘으로 겨우겨우 나 자신을 세상에 증명하며 살아갔는데, 이미 나를 의롭게 판단하고 선한 인생이라고 명명해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함부로 살 수 없다고 말이죠.
그 증거가 바로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서 교제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인위적인, 내가 만들어보려는 인생, 내가 스스로 성공시켜보려는 인생, 어깨에 너무 힘을 많이 주다 못해 탈이 난 이 인생을 이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하셨다는 사실이 나를 인정하시고, 내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임을 깨닫고 느끼시고 확신하고 고백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4) 본론잇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시간의 순서에 따른다면, 이 식사에서 하시는 말씀은 "유언"이었습니다.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이 이 때 대화를 가장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또 가장 독특한 문체와 단어들로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요한이 썼고 또 곁에서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통해 이 최후설교는 우리에게 굉장히 교훈을 주는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상의 핍박과 배교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갈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또 교회를 떠나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들을 붙잡기 위해서 또 힘을 주고, 다른 교회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서 유튜브와 영상매체에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까요? 만약 성령 하나님과의 자연스러운 교제와 사역이 우선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역의 근육을 굳게 만들고 탈이 나게 만들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로 풍성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2. 본론 :
1) 하나님을 미워하는 세상
우리는 어쩌다가 힘을 주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는 23절입니다.
23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미지는 갈등의 이미지입니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우리가 인터넷에 떠도는 예수님과 사탄의 대결이미지로 많이들 접했습니다. 때로는 우리 곁에서 천사와 악마의 이미지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대결구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미워함"을 말합니다. 이 구도를 요한은 처음에 요한복음을 쓰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대립과 대결의 구도가 아니라 어두운 곳에 빛이 비춰지는 구별과 구분의 이미지를 말합니다. 즉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는 이유는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구조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세력싸움, 파워게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이고 영적인 영역에서 이해되어지는 갈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4절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4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세상에 그간 있지 않았던 것을 한 사람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고 말해줍니다. 그것을 요한은 1장에서도 세상에 빛이 비추었지만, 세상은 그 빛을 몰랐고 또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반기지 않았다고 소개합니다.
25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도 알았고 요한도 알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바라고 말해주십니다.
3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4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시69)
세상이 흘러가는 원리를 말씀해주고 계신 것이죠. 분명 선과 악의 구분은 있지만, 그것이 우리 눈 앞에는 대결구도 또는 악의 절대적인 우위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들을 하나님은 이미 아셨고, 또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갔던 구약의 대표적 인물들(위 인용구절의 주인공 다윗)은 이미 겪었던 사실이고, 예수님도 그러했고, 이제 제자들에게 또 우리에게도 당연히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말했던 것처럼 까닭없습니다. 빼앗지 않은것 까지 물어주게 되는 억울한 상황까지 나를 미워합니다. 왜 입니까?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력대결이 아닙니다.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하게 당할 처사라고 성경은 예언해주고, 또 예수님은 유언으로 남겨주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싫어한다는 것을요. 다만, 그것은 우리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본질상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2) 무엇을 증명하는 삶인가 / 세상인가 교회인가
그렇습니다. 세상은 본질상 교회와 다릅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려는 모습을 우리는 뉴스가 아닐지라도 종종 보게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전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과 다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증명하려는 습성"입니다. 불안과 초조, 근심의 근원은 존재의 확립이 이뤄지지 않음에 따른 것입니다. 항상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성취에 대한 욕망, 상대보다 우위에 있어야 내 흐름대로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스스로를 향한 압박이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무언가 되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는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릇된 생활방식의 산 증거물에 불과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이고 잃을세라 줄곧 조바심 내기 마련이다. 도둑을 겁내고 경제적 변동을 혁명을 질병을 죽음을 두려워 할 뿐더러 사랑하는 행위에도 불안을 느끼며 자유, 성장, 변화의 미지의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진다. 그리하여 나는 신체상의 질병 뿐만 아니라 내게 닥칠 수도 있는 온갖 손실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에 싸여 살며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떠밀려서 방어적이 되며 가혹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결국 외로워진다.
이것이 물질에 대한 소유일 수도 있고, 명예, 평가, 사상, 신뢰, 관계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서 스스로 증명하려고 하는 습성은 나를 고립시키고 외롭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게 만듭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지난 3년 동안 자회사 인스타그램이라는 SNS가 젊은 사용자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부적으로 여러 차례 심층조사를 벌였고, 그 결과 10대 소녀의 32%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이 더 비참하게 되었다'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어린이용 SNS를 만들려는 기획을 가지고 있었던터라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결국 나를 외롭게 만들고, 더 나아가 나 스스로를 비참한 상태로 평가하게끔 합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을 뿐더러, 스스로 증명하려는 시도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러할 때 어떤 영향이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한 보수정치성향의 목사님이 한 사업을 펼치셨습니다. 로마카톨릭에는 바티칸이 있고, 이슬람에는 메카가 있으니, 개신교는 세계기독청이 필요하다는 논지였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24)
우리가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증명하려 할 때마다 무너지고 가치가 더 없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세상은 교회가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세상과 다르기때문에 더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처지라고 말해줍니다. 개인적으로 신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려고 할 때마다 세상과 부딪힙니다. 세상은 그것을 싫어합니다. 왜 너만 다르냐, 왜 너만 우리와 구별되느냐라고 물으며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려고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3) 하나님으로 사는 인생
이제 예수님은 12제자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이 조직은 유일무이한 리더를 잃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로마군은 이 세력을 혁명세력으로 눈여겨 보고 있으며, 유대교 권세자들은 이단자들이라 말하며 핍박하려는 시도로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이 떠나신다니 참으로 막막할 따름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세상이 미워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다른 것이라고, 원래 빛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이제 어둠 속에서 빛을 보일 시기가 온 것이라고, 어둠에서 새벽으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에게 이제 어둠 속에서 어떻게 살지 말씀해주십니다. 교회로서 어떻게 살아갈 지 말씀해주십니다. 다시 본문을 살펴봅시다. 26절입니다.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증명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예수를 증언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증명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삶으로 나타내고, 예수의 복음이 확실함을 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교회요 신자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두 언급합니다.
먼저는 성부하나님에 대한 언급니다. "아버지께로부터"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로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미래에 대해 궁금하기에 점쟁이를 찾아가고, 주식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하니 경제분석가를 30분당 10만원에 찾아가며, 부동산 정보를 얻기 위해서 유튜브를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가지고 계신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신비를,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인생사의 과정에서 필요한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합니다.
두번째로는 "내가 보낼 보혜사"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이란 표현이 있는데 우리 장로교가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 하나님이 발생되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되었다고 믿습니다. 어쨌든 성령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살 수 있게 증거하시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역사하심으로써 우리는 그와 한 몸이 되고 한 지체가 됨으로써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사해졌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중보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번째로 왕으로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사단마귀 권세와 싸워 이겨주심으로써 우리는 보호받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의지하여 우리가 가진 가정, 사회, 국가, 교회를 지켜내고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 예수와 한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정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보내주시는 분으로서의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더 정립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표현입니다. 보혜사라는 표현은 보호자 또는 협조자라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쨌든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 지체로 살아가게끔 도우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보통 쉬운 것이 아니지요.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밝히시고, 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증거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부르죠.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 어느것에도 매이지 않게 말이죠.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세상에서 스스로 증명할 필요 없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4) 나를 증언할 것 - 복음의 삶으로 풍요해지는 인생
제가 한 신문사 사설을 읽다가 읽은 표현인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과연 노인의 나이는 몇 살이며, 어떤 사람을 노인이라 해야 하는가?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청춘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고 마음의 상태로서, 사람은 나이 때문에 늙지 않고, 이상을 버림으로써 늙는다"고 하였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도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 늙지 않고, 인생의 황금기는 65세에서 75세"라 했다. 일본 여류소설가 소노 아야코는 계로록(戒老錄)에서 "받는 것을 요구하게 된 사람이 나이에 관계없이 노인이다"하여 색다르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진정한 성년이란 육체적 연령에 관계없이 베푸는 것이며, 누군가가 베풀어주기만 요구하는 사람, 베풀지 않고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 하여도 노인이라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담임목사님이 나이드셔서 교회가 늙어지지 않습니다. 그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그 교회가 말씀으로 충만하고, 그 교회가 그래서 성령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활발해지면 결코 교회는 늙지 않습니다. 젊은 목사님이어도 교회가 늙어질 수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다윗은 이유모를 핍박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32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시69)
하나님을 찾는 교회는 소생하게 됩니다. 다시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살아나게 됩니다. 젊고 트렌디한 교회건물, 음향 좋지요. 디자인 인테리어도 그렇게 되면 좋지요. 하지만, 하나님과 소통과 교제가 없다면 그 교회는 늙은 교회일 뿐만 아니라 교회가 아닐수도, 아니 더 적극적으로 말해보자면 교회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입니다.
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봐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뜻과 복음을 이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성은 섰습니다. "예수를 증언하는 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생계 다 팽겨치고 전도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삶을 통해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부인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자가 되었고, 핍박자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복음을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내는 것입니다. 교회가 젊어지는 것은 젊은 목사도 좋지만, 성도 여러분과 성령님과의 교제에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으로 복음을 살아내셨을 때 교회는 젊어집니다. 그리고 그 젊음에 반드시 힘없고 약한 영적인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복음 깨달은 그 복음으로 그들도 강건케 될 것이고, 이곳이 하나님의 자녀로 넘쳐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3. 결론
제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 중 하나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 분이 가장 욕심이 많다는 겁니다. 남들처럼 멀쩡한 배우자를 만나, 남들처럼 멀쩡한 직장생활을 하고, 남들처럼 순산하여 토끼같은 자식들과 함께, 남들처럼 오순도순 사는 것. 정말 어려운 것이고 또 날이 갈수록 더 어려워진 한국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직장을 찾기 힘든 우리 청년들, 결혼을 하고 싶지만 경제적 여유때문에 포기하는 이들, 결혼을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들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부들, 자식이 있지만 자식이 힘든 길을 걷고 있는 것을 곁에서 기도로 바라보는 부모님들, 노후에 대해서 막막한 준비를 하고 계시는 부모님들,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없음에 무료하고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많은 분들. 참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남들처럼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래도 복음이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니 나는 어깨에 힘을 빼고,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해주시는 복음 안에서 살아지는 인생,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때문에 살아지는 인생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번 한주 하나님과 함께 행복한 인생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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