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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주일설교

롬 8:22-25

by 우루사야 2021. 8. 29.

https://www.youtube.com/watch?v=sexteqbSwN4&t=2279s 

 

1. 서론 

1) 들어가기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찬양할 있고 함께 기뻐할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공동체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 잠시 기도하고 말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우리가 계속 날마다 샘솟는 샘물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8장이라는 가장 유명하면서도 어려운 본문들이었을텐데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중에서도 로마서 8 22-25절을 살펴보며 우리의 고된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예화 주제 

이번에 훈훈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남성 7 생일을 위해 후불로 피자를 보내줄 있는지 주문을 했고 피자집 사장님은 무료로 보내드렸습니다. 소식을 뉴스에 제보한 남성을 통해 피자집에 주문이 쇄도했습니다. 이후 후속취재를 살펴봤습니다. 남성을 위해 800만원의 성금이 모였습니다. 남성은 그것을 그대로 다시 기부를 하기로 했고 일자리 알선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취재진에게 남긴 문자가 "일상으로 다시 돌아갑니다"였습니다. 피자집 사장님도 이번 일로 쇄도한 주문분의 수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모아서 기부를 하겠다고 인터뷰를 하더군요. 분은 "본인의 일상으로의 복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분들 같습니다. 물론 그것을 받는다고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만, 본래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일상.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생활력이 돋보이는 뉴스였습니다. 

인생의 방향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항상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목적지가 있지만,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목적지가 있지만 항상 길을 방황하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안락한 일정한 처소가 없기 때문에 어디론가 정착할 없고 매일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고향" 도착하지 않는 이상 계속 나그네 인생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때를 참고 기다릴 있어야 합니다. 아파도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벼락같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삶의 연속에서 깨달아집니다. 인생은 순간으로 설명되어지지 않습니다. 순간들이 이어지고 삶의 조각들이 모여야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상은 특별한 이벤트보다 우리를 설명해줍니다. 사람을 직종, 연봉보다 성품, 인격으로 있듯이 말이죠.

3) 본론잇기

이번 큐티는 7-8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오호라 곤고한 자라"라고 우리네 나그네 인생길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8장에 와서도 우리가 아직 천국에서 완벽한 구원을 받기 이전의 신자이기에 아직까지 탄식과 기다림, 인내가 필요한 시기인 것을 말하며 권면하고 있지요. 우리 행복한 교회 성도님 한분한분의 삶이 지금 얼마나 힘들고 복잡하고 어려운지 하나님이 가장 아십니다.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미래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서 준비하고 계신 믿습니다. 장차 우리의 마지막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오늘 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받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 본론

1) 인간의 포지션
(1)
탄식하는 인간 - 피조물과 같음
우리가 살아가가는 나그네 인생길에 대해서 바울은 2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그런데 22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받는 다는 표현은 무엇을 말할까요?

본래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온지구를 만드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서 좋았더라의 의미는 유쾌하고 즐겁고 향기롭고 상냥하고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서 이렇게 쓰였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창조주의 관점에서 가장 좋은 상태" 바로 피조물들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이라는 대표자의 죄로 지구에는 노화, 고통, 갈등, 살육이 나타났고, 결과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상태에 대해서 바울은 "탄식하며 고통을 겪다"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고통은 "산모의 고통" 쓰는 단어였습니다. 단어를 이유는 가지인데 첫번째를 먼저 알려드리고 번째는 조금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첫번째는 피조물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고통 순위가 있는데 여러분 만성요통 아시지요? 위일까요? 5위입니다. 허리가 끊어질 아픈 것입니다. 1위는 작열통이라고 화상 때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사이에 출산의 고통이 있는데 3위입니다. 그만큼 피조물이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바울은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2) 기다리는 인간 - 속으로 탄식하는 인간
그런데 인간이 고통스러움으로 같이 "탄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탄식을 해도 "속으로 탄식한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이는 어떻게 웁니까? 빼액하고 웁니다. 어른은 어떻게 웁니까? 눈물 젖은 빵을 먹지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구원받은 자가 죄와의 갈등, 세상사의 고단함 속에 가끔 어떻게 말합니까? "차라리 하나님께 빨리 갔으면 좋겠네." 이게 진짜 그렇다는게 아니겠지요. 날을 기대하고 고대하면서도 일상의 고통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탄식인 것입니다. 산모의 고통이라는 단어를 번째 이유는 이겁니다. 미래에 출산과 같은 기쁜날을 맞이할 산모처럼, 신자도 미래에 하나님을 만나 새하늘 새땅 새존재가 날을 기대하며 산고의 고통을 살아내는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신자의 삶은 세상이 주는 만족으로 안주하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견물생심이라고 하죠.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셨죠.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보물 있는 곳에는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눈이 성하면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사람이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19-24) 우리의 일상과 눈은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속상해하며 탄식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3) 보지못하는 인간
다시 본문입니다. 23 하반절에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뤄진 겁니까 아직 안이뤄진겁니까? 미래의 일입니다. 날에 이뤄질 하나님의 자녀됨, 우리 몸의 속량으로 부활체가 되는 .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래서 25절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됨, 부활, 속량, 천국행을 바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이게 사람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 달려가라고 하면 좋겠는데 그게 아닌거죠.
우리 눈의 어두움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봐야 것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믿어" 살아갈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2) 태도
이렇게 우리의 현재 상황은 그닥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며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응어리 맺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을 살아낼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심령에 "명확한 동기부여와 생명력으로 말씀해주시고 증거해주시는 성령 하나님" 때문입니다. 

(1) 성령을 첫열매로 받은 우리
바울은 신자된 우리를 설명하면서 23절에 "우리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성령을 열매로 받은 신자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마지막 열매이자 최종의 목표라면 성령 하나님을 만난 것은 첫열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에스코트를 나와주신 분과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일상을 살아낼 있습니다. 분과 함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걸어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상에서 양심 속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지 귀기울여야 합니다. 음성을 들으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항상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속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시며 살아갈 길에 대해서 증거해주십니다. 

(2) 몸의 속량 - 완전체가 우리
그렇게 성령 하나님과 살아가며 천국행을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드는 질문이 가지 있게 됩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손해, 마이너스, 아픔, 무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을 감수하면 나만 손해가 아닌가? 이걸 지금 내가 감당해야 할까? 양심의 소리에서 여러분에게 무조건적인 손해를 감당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그리스도인 컴플렉스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양심의 소리를 분별하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손해날 것을 포기하고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위해서 피해입기를 다짐하는 . 그것은 우리의 선함으로는 결코 감당할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럼 이것들이 가능합니까? 바로 우리의 영혼이 본능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몸의 속량"입니다. 23절에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상태의 회복과 복구, 최상의 상태로의 전환을 기다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부활체 또는 완전체라고 부를 있는 우리 몸의 최고의 상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창조때의 상태에서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바랬던 결정체입니다. 몸을 가지고 우리는 "왕의 직분을 가지고 우주를 다스리는 "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3) 인내와 사랑
24
절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은 "획득하다"라는 의미와 전혀 다릅니다. 얻어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소망"이라는 것이 나타나더니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이 생깁니다. 약속 안에 "양자됨 몸의 속량"이라는 혜택들까지 얻게 것이지요. 확신이 생기니 참으며 기다리는 인내까지 얻었습니다.

속량에서 속은 죄를 면하기 위해 돈을 바치다이고, 량은 어질량 그러니까 선한 좋은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군가 선한 행위로 타인의 죄를 면하게 하기 위해 대가를 바치는 것이 속량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양자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속량의 약속을 받고 성령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일상을 속으로 탄식하면서 때론 성령님의 응원을 받으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예수와 같이 살라" 말이죠.

예수님의 인내는 무엇이었을까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버리셨나이까. 속으로 탄식하시며 시간을 이겨내셨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정죄, 군병들의 폭력,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모욕. 이것들 속에서 예수님은 속으로 탄식하시며 성령님의 능력으로 시간을 이겨내셨습니다. 탄식하며 소망을 바라보 사랑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대속으로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은 과연 어떤 삶입니까? 부랑자의 삶이라 재물에 소망을 두었다가, 자식에게 소망을 두었다가, 명예에 소망을 두었다가 살았던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그네, 집이 생겼고 부모가 생겼고 고향이 생겼습니다. 소망은 어떻게 시작하게 것인지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우리가 "두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랑자의 삶을 끝내고 "고향으로 가는 나그네의 " 살아낼 있게 되었습니다. 집을 향해 한발걸음씩 살아가며 우리는 "예수와 같은 사랑의 일상" 보내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첫번째 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2 16절로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이것들에 대해서 설명해줍니다.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나님이 주신 대표로서 에덴동산을 지키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섬기는 맥락에서 선악과를 지키며, 하나님이 주신 베필과 한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속량으로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악을 분별하며, 하나님이 나를 통해 다스리길 원하시는 에덴동산인 가정과 직장,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 속량" 삶입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선한 행위를 없습니다. 율법의 선함을 우리 마음에 있는 죽음의 , 사망의 , 마음의 법으로 악용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속량은 법들을 충족시켰습니다. 법들을 완수하신 예수가 우리의 대표가 되시니, 우린 아래에서 구원의 혜택들을 누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할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로 인해 우리는 탄식하면서도 사랑할 있게 되었고, 손에 쥐어지지도 않았지만 사랑할 있는 사람, 미래의 이익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랑할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탄식과 고통, 오랜 바람은 그래도 사랑의 인생이라는 줄기 속에서 공존하지만 잔가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3.
결론
길을 걷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성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인내"아닐까 싶습니다. 인내는 기한을 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우리는 함께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없으나 날을 기다리며 우리의 "일상" 살아내며 인내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입니다. 

인내의 삶에 대해서 류시화 시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볼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가시를 보고 피어날 장미를 아는 것이고, 어둠을 보고 떠오르는 보름달을 아는 것이다." 아내와 카페를 갔는데 있던 문구를 가져와봤습니다. 문구를 아내가 추천해주었는데 이번 설교와 너무 맞아떨어졌습니다. 장미가 피기에 가시돋힌 줄기를 잡으며 물을 주고, 밝은 보름달이 저녁날이기에 어두컴컴한 발길을 옮겨 달밝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나그네 인생길을 걷는 이유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것을 알기 때문에 고단하고 곤고한 인생길을 하루하루 걸어나갑니다. 

이번 어떤 일과와 모임, 고민, 문제, 기도제목이 있으십니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속량" 이루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속량은 현실이 것입니다. 나는 완전체가 것이고, 인생이 심판대에 정죄는 없습니다. 이후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관식을 가져 왕이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을 향해 이번 한주도 묵묵히 걸어나가실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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