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울은 에베소교회에게 "빛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두가지 이미지가 함께 있습니다. 빛과 자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8절부터 보시죠. "8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구절에 시기에 대한 표현을 함께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빛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어둠은 빛이 없음입니다. 마치 죽음은 생명없음처럼 말이죠. 어둠과 죽음은 본래 없는 것이죠. 빛과 생명이 없는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본래 없어지는, 무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무언가가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겁니다. 특히 '주안에서 빛이라'는 표현이 결정적이죠. 주는 "예수 그리스도", 네! 여기서도 예수 안에서. 예수라는 존재 밖에서 인간은 없어지고 먼지밖에 안될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으로 들어올 때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인간에게 심겨져있던 약속, 하나님의 계획, 섭리, 명예로운 위치 등이 회복됩니다. 놀라운 일이죠.
바울은 에베소교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로의 우열을 따지며 땅의 사람들과 같이 없어질 존재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되었음을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들, 본래 스스로 빛났던 하나님께서 그 빛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비춰내는 반사체이자, 그 빛을 가지고 빛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 우리의 빛남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 빛남은 무엇을 말합니까? 9절입니다.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10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하나님의 빛을 이어받아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존재.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그 빛은 세상이 가지지 못하여 어두워졌습니다. 착함, 의로움, 진실함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약속으로 창조하시어 가장 선하게 세상을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구속사에서의 착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으며 완성될 세상을 향해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고 나누는 착함을 가지게 됩니다. 의로움, 세상의 정의와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움"입니다. 예수가 우리 인간의 죄를 가져가심으로써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그 어떤 지식이나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신의 희생"으로 인해 의로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누구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없고 용서와 용납으로 의로움을 내비쳐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신의 희생을 터부시하며 자신을 옳게 여기는 이를 향해 지탄할 수 있는 의로움도 있어야 합니다. 진실됨, 성령은 우리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깊은 지혜로써 무엇이 진실된 것인지, 어떤 것이 진실의 맥락에 있는 것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성부와 성자가 하신 일들 속에서 진실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런 구속사적 착함과 의로움, 진실됨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빛을 비춰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부터 단호히 말합니다.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12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네, 빛은 반드시 열매를 거둡니다. 선하과 의롭고 진실된 열매를 맺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비추지 못해 열매없음을 "책망"하라고 말합니다. 네! 교회가 열매가 없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부흥이 없다면 돌아보아야 합니다. 잘못되었기 때문에, 무언가 이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지 못할 것이 있기 때문에 열매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책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빛을 비추어 나를 돌아보며 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없는지, 세상을 향해 "여기 빛이 있으니 보시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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