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에게 죽음은 끝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뒤따라 올 인류가 죽음을 넘어섬으로써 신과 같이, 부활체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입장하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첫 부활자, 부활의 열매로써 예수가 일어서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부활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부활시킨 나사로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나사로가 시기적으로 먼저 부활했지만, 나사로의 부활은 의미하는 바가 예수의 부활과 비견할 수 없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을 나타내기 위한 표시역할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본격적인 인류가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신호탄이요 변곡점이요 시발점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예수가 미리 말한 부활의 말씀, 그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고 다그쳤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누가는 두 번째 부활사건으로 예수를 뒤따르던 많은 제자 중 두 사람에게 나타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주고자 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말씀을 깨닫지 못함"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자 하십니다. 13절부터 보시죠.
13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14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18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부활소식을 듣고도 슬픈 기색을 띄며 걸어갑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기에 부활 소식은 허무맹랑한 여인들의 말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무덤에 예수의 시체까지 없어지니 예수공동체의 결집력은 사라진 것처럼 느꼈을 겁니다. 축 쳐진 어깨와 힘이 없는 발걸음으로 예루살렘 바로 옆도시 엠마오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죠. 16절에 보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이 눈을 누가 가리웠을까요? 네. 부활의 라이브 장면을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이, 이 두 제자의 눈도 가리셨던 겁니다. 왜 입니까? 부활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원리"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순리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살아보면 안다" 네, 신자로 믿으면서 살아야만 깨달아지는 순리가 바로 부활순리입니다. 낮아지면 높아지는 원리죠. 콩심으면 콩나고 팥심으면 팥이 납니다. 그런데 그 콩과 팥, 그리고 땅은 그럼 누가 만들어서 이 세상에 심은 겁니까? 삼위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만들어서 주신 것 아닙니까? 이 세상 근본 자체가 낮아지고 섬김으로써 삼위 하나님이 서로 함께 계셨고, 그래서 인류를 만들어서 삼위 하나님이 인류를 섬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낮아지고 섬기면 풍성한 인생이 되는 것이죠. 이걸 살아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지 못하면 살아내지 못합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 두 제자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과 희생, 고난과 수난 후에 부활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음에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말을 건내셨습니다. 대화에 끼어주면서 제자들이 무슨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자기들 곁에 다가온 다른 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9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22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23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24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지금 주간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 기간입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한 사람이 성전을 뒤엎고 대제사장을 비판하다가 결국 로마총독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니 원래 유명했던 예수가 더 유명해지고 이 소식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전국 더 나아가 해외에까지 퍼져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자가 있다니 기가 찹니다. 어쨌든 이 제자는 이 예수에 대해서 설명해주고자 합니다. 뭐라고 소개합니까? 첫째,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둘째,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 셋째, 죽었지만 무덤에서 없어져진 자라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의 태도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면 엠마오로 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죠.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글자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인류의 살아온 역사의 과정, 즉 구속사 안에서 부활이 갖는 의미를 하나하나 깨닫게 해주시죠. 네, 믿음을 가지고 살아봐야 부활이 깨달아지고 몸에 와닿고 내 삶에 영향이 미쳐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두 제자에게 여인들이 전해주고 11명 제자 중 한 사람이 무덤에 다녀왔다는 소식도 전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제자들은 부활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무엇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믿지 못하게 된겁니까? 이들이 바랬던 예수의 모습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죠. 이들이 예수를 표현할 때 가장 먼저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네, 자신들이 바라던 묶은 문제를 해결해 줄 자로 여겼습니다. 두번째로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는 표현도, 하나님께로 인도할 구원자가 아니라 로마로부터 구해줄 자를 말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런 그가 무덤에서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그것을 부활로 연결짓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인식었던 것이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부활 메시지를 듣는다 하여도, 예수가 재림하여 내 눈 앞에 나타난다 하여도 내가 "예수와 같은 낮아진 길과 시간"을 살아내지 않는다면, 결코 나에게는 예수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습니다. 가짜 예수들에게 속아넘어가다가 진짜 예수가 나타났을 때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사랑하고 섬기고 낮아지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와 같은 길을 걷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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