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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누가복음_하나님의 아들

눅 23:39-43

by 우루사야 2024. 5. 17.

예수의 일대기를 살피다보면 십자가에 못박히는 날 전후 3일 동안에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자세하다 못해 여러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이 나타나죠. 지난 본문에서 두 강도, 구레네 시몬, 뒤편의 우는 여인들, 십자가 아래서 조롱하는 여러집단들까지. 그 밖에도 심판 과정에서 등장한 여러 재판관과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 그리고 예수님의 12제자들의 다양한 반응들까지. 간단하게만 언급해도 3-4일 동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언급하며 표현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과연 우리는 예수를 향해 어느 위치에서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예수의 죽음을 목도한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지난 본문에서 언급된 두 행학자 강도입니다. 먼저는 다른 이들과 같이 조롱하는 자입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 성경은 우리가 초반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데오빌로라는 이에게 "예수에 대한 자세한 점"을 말해주기 위해서 쓴 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마지막이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니요. 이 내용으로 다른 누군가를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특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향해서 로마군인, 관리들, 그리고 한편에 못박힌 다른 사형수까지 "스스로를 구원해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당연한 견해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합당한 근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내 예수는 구원을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구원해내지 못한다면 이야말로 넌센스가 어디있습니까? 사랑하자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이의 말은 설득력이 없을 뿐입니다. 

사실 이런 견해의 출발점은 제자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강력한 지도자로 바라보았으니까요. 그는 자기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이도 구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적인 수준도 상당했습니다. 그라면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이들, 아니 나라 전체가 예수는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퍼졌습니다. 게다가 수만명은 적극적으로 예수를 지지하며 따라다니기까지 했지요. 그러니 예루살렘에 들어온 예수를 향해서 강력한 리더십과 지도력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견해들은 점점 조용해지는 예수를 향해서 비난과 조롱으로 바뀌어갔던 겁니다. 

여러분.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어지고 거짓예수가 판을 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근과 전쟁이 날로날로 심해지면 심해지지 약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은 세상사람들에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어떻게 행복하냐고 되물을 겁니다. 그들은 결코 영혼의 행복을 알지 못합니다. 복음이 주는 행복을 결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가 구원을 베푸는 것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님에도 예수에게 스스로를 구원해보라고 요구하는 이들과 같이 전혀 다른 차원과 생각의 차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이제 겪어내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불행해지지만, 우리가 진리로 자유하고 풍성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이유와 근원이 예수와 복음에 있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본문에서 예수와 다른 한편의 강도는 죽을 운명 앞에서 얼마나 풍성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함께 보시죠.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어찌보면 이들도 유월절 특별사면 대상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오히려 바라바보다 자신이 덜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사면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사형대에 올라 십자가에 못 밖혔습니다. 한 사람은 불평과 세상을 향한 비관으로 예수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 있던 한 강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가 무죄하지만 이 십자가에 못 밖혔다는 것이 보통의 일이 아님을 눈치채게 됩니다. 더욱이 그는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해줍니다.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을 통해 예수가 "무죄함"이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됩니다. 빌라도를 통해서 드러났던 무죄함이 같은 사형수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죠. 

이 사형수는 무죄한 예수만을 고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구원"에 대해서 간청합니다. 단순한 의인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인도자라는 사실을 그는 고백한 것이죠.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런 대화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강도는 죽음 이후에 예수가 자신을 인도해줄 수 있는 하나님임을 깨달았던 것이죠.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그 분은 과연 지금 내 앞에 있는 고난과 수난을 너머서 나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입니까? 죽음을 너머 부활로 인도하실 수 있는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의 경제적 생활, 사회적 갈등, 질병, 마음의 고통, 그 밖의 어떤 고비도 너머서 예수가 나를 인도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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