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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누가복음_하나님의 아들

눅17:1-10

by 우루사야 2024. 4. 11.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며 가르침을 주 실 때 바리새인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오히려 재물을 써서라도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우선순위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만 따로 모아서 가르침을 주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제자도에 대해서 더 심도있게 이야기하셨던 것인데, 누가는 이것을 간략하게 잠언형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조심해야 할 2가지의 가르침과 소망을 가져야 할 2가지 가르침을 주십니다. 먼저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제자들은 앞으로 새로운 신자들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제자들은 작은 예수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즉 예수가 자신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과 영생, 복음을 소개해주었던 것처럼, 12제자들도 새로운 신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으로 새로운 신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거나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에 대해 소망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굉장히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듣기에 굉장히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새신자 하나가 만약 실족할 때에, 차라리 그 새신자를 인도한 자는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차라리 낫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문장을 자칫 잘못 해석하면 이럴바엔 누가 사역을 하려고 하겠는가라는 생각까지 들정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부분은 잘못된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새신자"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르치거나 신앙생활에 대해서 소개할 때 가끔은 갈등이 있을 수 있지요. 오해나 실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때문에 새신자가 신앙생활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하는 실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열심히 해보려고 했던 우리의 사역과 진심을 모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잘하면 됩니다. 영혼구원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는 도울 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의도적인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아기에게는 아기에게 맞는 부드러운 식사를 제공합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 자신의 욕망이나 고집으로 아기에게 맵고 짜고 단단한 음식을 억지로 먹인다면, 그래서 그 아기와 같은 새신자가 신앙생활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면 그것은 의도적이고 교만한 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용서의 가르침도 함께 주셨습니다. 네, 여러분. 다른 이를 용서할 줄 아는 자. 반복되는 실수와 넘어짐을 받아들이고 케어하고 돌보고 안아줄 수 있는 자는 잘못된 가르침을 줄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용서의 사랑을 성령 하나님이 제자의 마음에 주시는데, 어떻게 악한 마음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주겠습니까? 용서의 마음이 없고 반복되는 실수를 받아줄 마음이 없는 제자라면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지에 대해서 의심이 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자는 새신자를 향해 실족케 하는 가르침으로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은 "믿음을 더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믿음은 분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존재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네, 여러분. 우리가 신자로써 또 제자로써 또 먼저 은혜받은 자로써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주시는 사랑과 은혜, 자비, 가르침으로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도저히 바뀌지 않는 그 영혼을 회개케 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마음을 열리게 하여 복음을 듣게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결국 제자는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자여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도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부자연스럽게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삶을 살았고, 할 말을 했고, 행동해야 할 것을 했을 때 내 삶 자체가 복음이 되어서 전파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으로 실족하게 된 자들이 있다면 두 가지입니다. 정말 내 삶이 잘못 되어서 믿음의 본보기가 못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중도에 포기해야 할 삶일 정도로 악한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로써의 삶을 산다면, 분명 그 삶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거부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할 일은 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나의 생활 그 자체"여야 합니다. 7-10절을 보시죠.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만약 전도하는 것이 특별한 결단과 헌신이라면, 우리는 댓가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가 하나님이 좋아서 살아가는 삶이라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살아지는 삶이라면,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서 행해지는 삶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주님."이라고 말이죠.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바랍니다. 축복된 삶으로 인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삶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이 생활 자체,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 삶을 누리는 것 자체가 감사요 믿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주시던 해주시지 않으시던 우리는 살 시간을 살아내고, 가야할 공간을 가며,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며 제자의 삶을 복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생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명예롭게 살아갑니다. 예수의 제자로써 자기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성령의 전으로써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기쁘고 그것이 사랑스럽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음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지탄받을 실족할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충성된 종이라 칭하실 때 우리는 "주님 저는 살기만 했을 뿐입니다" 겸손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풍성하고 명예롭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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