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계속해서 예수공동체원으로 누가 어울리는지에 대해 예수님은 소개해주고 계십니다. 그런 점에서 누가는 여성들을 만이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고대사회가 남성중심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줄 아는 가난하고 여리고 약한 자에 속하는 여성이 많이 언급된다는 것이 눈에 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악귀가 떠나갔고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죄에 묶여 짓눌렸던 자들이 예수를 따르며 자유인이 되었고, 자신들의 소유로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기까지 합니다.(1-3절) 이렇게 예수공동체원들의 색채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4가지 밭비유로 설명하고자 하십니다. 마태는 여러가지 비유를 함께 소개하면서 네가지 밭비유를 말해주었는데, 누가는 이런 맥락에서 소개해주고 있는데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지 함께 살펴보시죠.
1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2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3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4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5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6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7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우선 예수님이 지난 번 4복4화 설교에서는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비유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는 좀 더 쉽고 직접적이고 확실한 메시지와 기적을 통해서 공동체의 세력을 불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더 걸러내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걸러 "신실한 믿음"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비유는 "듣고자 하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신비한 이야기"인 셈이죠. 그런 점에서 4가지 밭비유는 듣지 못하는 자들의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9-10절을 보시죠.
9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10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의 은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자기욕망이라는 우상을 섬기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는 기준이 되셔서 받아들이며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와 반대로 비밀 자체를 거절하고 거부하는 자로 나누고 계신 것이죠. 자칫 거절하는 자들이 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예수님은 "진심"으로 다가오는 자에게만 허락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진심이 아닌 마음과 진심인 마음을 4가지 밭으로 표현하셨죠. 씨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왔을 때 4가지 반응이 있다는 겁니다.
1-3번째가 부정적 반응인데, 첫번째는 길가입니다. 12절에 보니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으니 그 말씀을 마귀가 가로채갑니다. 비신자에 가까운 마음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전혀 마음이 열려있지 않지요. 주의 은혜의 해를 누리면서도 마귀가 활개치는 마음은 예수자체를 거절하는 자라고 볼 수 있지요.
두번재는 바위자갈밭입니다. 13절을 보니 말씀 들을 때에 기쁨으로 듣고 받습니다. 씨앗이 심겨지긴 합니다만 뿌리가 내리기에는 흙이 없고 거친 돌들이 가득합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할만큼 진심이 없습니다. 특히 힘든일이 다가오면 그 진심이 금새 사라지고야 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제 본문에서 예수를 초대해놓고 죄지은 여인이 오자 예수를 시험하고자 했던 바리새인이 이런 유형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가시나무가 있는 밭입니다. 14절에 보니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 향락"이라는 기운에 막혀 서 결실이 없는 자,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길게 가져가긴 하지만 회개의 열매, 은혜의 결실이 없는 자인 것이죠. 3년 동안 예수와 동거동락했으면서도, 결국 마지막에는 뇌물 앞에서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유다가 대표적 예가 될 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가룟유다가 과연 한번에 이렇게 넘어갔을까요? 본문을 보면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한 자", 그러니까 씨앗이 뿌려져 심겨져 뿌리내리고 줄기 이파리까지 있을 건 다 있지만, 자라는 내내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와 다른 무엇을 계속해서 동시에 마음의 중심에 두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죠. 네, 결국 자기자신이 마음의 중심에 서서 하나님도 정도껏, 재물도 정도껏 섬기며 신앙생활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율법을 잘 지켜온 젊은 청년이 재물 앞에서는 무너져버려 예수 앞에서 떠나갔던 일화가 있는데, 이 자가 가시밭의 실례가 될 것 같습니다.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12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세가지 밭의 공통점은 결국 "온전한 결실"이 없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네, 이 설교는 지금 당장 우리의 영적상태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추수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시는 유형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는 이 마지막날을 향해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잘먹고 번영하고 세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날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다 판단받기 위해 지금 온전한 결실을 맺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인 것이죠. "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공동체원들에게 "결실이 있는 인생"을 살자고 하십니다. 그 결실은 이 땅에 살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멀리 보아야 합니다. 더 크고 원대한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태는 그래서 30배, 60배, 90배라는 비현실적인 수치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언급을 소개했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이뤄질 일들을 바라보며, 지금 오늘 나에게 주어진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하며 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해야 한다, 즉 나의 악한 죄인의 마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 물어가며 함께 생각하며 함께 고민하며 말씀을 현실에서 살아내는 인생을 살자고 하십니다. 그런 자가 들으면 깨닫고 보면 열을 아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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