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많이 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굳건한 말씀 위에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나의 생각이나 내가 선호하는 방향을 하나님의 뜻에 집어넣어 합리화할 때가 많고 이것으로 주변인들에게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방향과 뜻에 대해서 알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어제 우리는 4가지 밭 이야기를 통해서 종말 때에 결실을 맺기 위한 "성령이 도우시는 좋은 밭 만들기"가 우리의 방향이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16-18절입니다.
16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17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그간 감추어져있었습니다. 명확한 빛이라기보다는 간접등과 같았습니다. 희미했죠. 율법, 성막, 제사 등과 같은 것들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왔습니다. 직접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그 예수는 영으로써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그러니 구약시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가장 놀라운 길이 주의 은혜의 시대에 열린 것이죠. 그래서 17절에 보니 장차, 앞으로 드러나지 못할 것이 없다고까지 말하십니다. 등불이 여기저기 비출 수 있도록 위에 두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죠.
여기서 밝아진다는 것은 소망과 희망의 개념이 아니라 "죄가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그 전에는 자기자신이 심판자가 되어서 잘못을 지적받지 않았던 인류였지만, 예수가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점점 죄와 죄가 아닌 것이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이 상황에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네, 기준이 다른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죽고 사는 마냥에 천원이냐 이천원이냐, 빨간색이냐 초록색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아야 합니다. 19-21절을 보시죠.
19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20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예수라는 기준이 이 땅에 옮으로써 세상은 점점 "의로운 것과 죄악된 것"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이런 구도에서는 가족이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가족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기준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여러분의 가족이 있는데, 그 가족이 살인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셔야겠습니까? 그 때는 가족이라는 범주보다 사회정의라는 기준을 더 앞세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신고해야 합니다. 그 가족이 정당한 판결을 받아 뉘우칠 수 있도록 해야 하죠.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의 기준으로는 죄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특히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심으로써 우리의 양심은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의로운 것과 죄악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양심의 등불을 이 땅에 그리고 우리 심령 가운데 두신 것이죠. 그래서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또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우리 양심의 기준이 되어주신 예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해서 말해주고자 합니다. 22-25절입니다.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네, 예수는 우리 양심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기준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연원리원칙에서도 기준이 되어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가 신기한 능력을 행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어 잔잔케 만드실 수 있는 기준"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바람과 물이 순종하는 분이라는 것이죠. 단순히 인간의 양심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심리학자스러운 지혜로운 재판관이 아니라 양심을 꿰뚫어보고 판단하고 기준을 세우되 모든 사람의 것을 한가지 기준과 일괄적인 판단을 가지고 중심에 서실 수 있는 "신으로써의 기준"이심을 소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은혜를 거절하는 길가밭인지, 누가 가시나무가 되어서 복음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황폐케 하는지, 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다 이 땅의 세속에 더 관심이 많은 돌밭인지 꿰뚫어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기준은 변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신적인 차원의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18절에서 제시해주신 예수님의 권고를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하늘로부터 말씀이 주어질 때 우리는 주의깊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주의깊게 들어라" 진심으로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는 은혜가 주어졌는데 더 주어질 것이요,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그마저 있었던 양심의 가녀린 빛줄기조차 잃어버리고 더 악독해지고 말 것입니다. 강퍅해지고 말죠. 오로지 자기자신의 합리화를 위해서 더 독하게 살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과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지금 나에게 어떤 길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지 진심을 다해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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