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의 공생애의 방향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처한 갖가지 현실에서 실제적인 대안과 해결책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한가지, 인류가 묶여있는 현실에서 자유를 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이 변형시킨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만든 하나님의 모습은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당시 가장 인기있는 신의 모습이었죠. 이런 식의 불경스러운 일은 예수님 시대에도 일어났고 또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인기있는 신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과 정신에 평안을 주는 하나님아닙니까? 20년 전에는 성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이었죠. 인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변형시키고 왜곡시키며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잘못된 인간의 신인식에서 자유함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자유함을 주고자 하시는지 함께 살펴보시죠. 1-4절입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2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때는 안식일입니다. 십계명에서 가장 정중앙에 있는 계명은 안식일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20:8)였습니다. 이 법령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6일은 일하셨지만 마지막 7일은 쉬셨다는 것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 쉼이 필요하셔서 쉬셨을까요? 아니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쉼이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움직이면 쉬어야하고, 활동하면 에너지를 채워야하며, 낮에 일어나면 밤에 자야하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중심으로 활동하라는 "원리"를 알려주고자 하셨던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율법학자들은 이 율법을 왜곡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진심을 변형시켰죠. 그래서 안식일이 되면 사람을 옭아매어 움직이지 못하게끔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죠.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걸어다니며 제자들과 함께 밭에가서 밀이삭을 비벼서 간식을 드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언행에 불을 키며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딱 걸린 것이죠. 못할 일,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그들이 얼마나 "말꼬리잡기"를 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더 큰 법령이 있다면 작은 법령은 자연스럽게 큰 법령에게 귀속되어서 어겨도 무방하다는 원리를 가지고, 다윗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하나님께 드린 진설병 떡을 먹은 사건을 제시하십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이 먼저지 안식일 법령이 먼저냐는 것이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도 않고 먹을 것을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길가에 다니다 간식을 먹은 것이 대수냐는 언급이신 것이죠. 그러면서 5절에서 명쾌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5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진설명을 제사장만 먹을 수 있다는 제의법(제사법)보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십계명 6계명이 더 큽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쫓겨다니며 죽을 위기에 있었던 다윗은 진설병을 먹으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안식일보다 더 큰 존재로써의 자기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안식일 십계명보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인류를 구하러 인간이 되신 예수가 더 크다는 주장을 하십니다. 네, 예수는 하나님의 뜻 그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향해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율법 모든 것을 지킴 사람보다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는 영적원리를 인류에게 제시하시며, "너희가 왜곡시킨 신관으로부터 자유해져라!"라고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그런 자유를 이제는 실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본문 6-11절입니다.
6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7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8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10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11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이 치유사건을 일부러 안식일에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안식일 뜻을 왜곡시킨 율법교사들을 비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고치는 사역을 함으로써 마치 "노동을 함으로써 안식일 계명을 어긴 것"처럼 몰아가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계략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십니다. 그들의 계략대로 행해주실뿐만 아니라 더 강조하고자 하십니다. 8절에 보니 손에 마비가 온 사람을 한가운데 서게끔 하시고 그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되물으십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선하냐, 아니면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선하냐,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어떤 계명이 먼저냐"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극적으로 상황을 만드십니다. 필요치 않은 노동이라는 것의 틈도 보여주지 않고자 '말씀'으로만, 그리고 순간적으로 손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으로도 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일부러 정중앙에 세우고, 바리새인들과 대화를 나누셨던 것이죠. 이를 통해서 이 사건은 단순한 치유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목적을 말해주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목적, 방향, 비젼"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람이 왜곡시켜온 신관"을 바로잡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여 살리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율법, 어떤 계명, 어떤 전통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였고, 이 진리로 인류는 자유해졌습니다. 혹시 우리가 왜곡시킨 하나님의 모습으로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뒤로두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예수님의 오늘 일화를 통해 바로하여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하여 나에게 맡겨진 그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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