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 들어가기
오늘 이자리를 만들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자랑이 되고 또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될 줄 믿습니다. 이번 한주도 오늘 예배를 통해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2) 예화
한 우화로 시작하겠습니다. "한 방앗간 주인과 그의 아들이 당나귀를 내다 팔기 위해 끌고 가는데, 그러던 가운데 지나가던 방물상이 "세상에, 이런 바보들을 봤나? 당나귀를 뒀다 뭐하나?"라며 비웃자 아버지는 아들을 당나귀에 태우고 갔다. 그렇게 가는데 노인들이나 농부들이 그들을 보자 "불효막심한 놈, 지 편하자고 늙은 애비를 걷게 하다니! 뭐 저런 패륜아가 다 있어!"라며 크게 화를 낸다. 이에 아들이 내리고 아버지가 당나귀에 타며 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물 앞에서 물을 기르던 아줌마들이 그 상황을 보고 "비정한 인간, 어떻게 아버지가 되어서 어린 아들을 걷게 놔둘 수가 있어요?"라며 화를 내고, 결국 이번에는 부자(父子)가 같이 당나귀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그것을 본 한 무리의 건장한 사나이들이 아버지에게 "못된 사람들(동물학대자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짐승이 불쌍하지도 않소?"라고 말하자, 이에 부자는 진짜로 당나귀의 다리 둘을 막대기에 묶어 어깨에 메고 갔다. 이 모습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마을 입구에 가까운 다리를 지나가던 중, 당나귀가 밑에 물이 흐르는 걸 보고는 겁이 나서 발버둥치다가 줄이 풀리는 바람에 개울에 빠져 익사했다. 그걸 본 부자는 잔뜩 풀이 죽은 채로 귀가했다." 이 이야기는 팔랑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우화로 풀어낸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잣대없이 여러가지 의견에 휘둘리다가 결국은 아무런 유익도 못얻는 사람을 말합니다.
3) 주제
이 우화는 우리 구원의 문제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이런 방식, 저런 방식, 다른 방식이 우리 머리를 휘젓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배가 산으로 갑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하나의 목소리, 그리고 성경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소리로 우리의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성경의 소리 하나님의 주권을 괴롭히는 다른 소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 미디어, 타종교, 적그리스도.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가장 많은 사공노릇을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의 경험과 주관, 아집, 고집은 여러 사공들을 만들어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르거나 비슷하지만 틀린 이야기들을 우리의 머리로 보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못듣게 하지요.
- 한 신학자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하더군요. 여기 동그란 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럼 동시에 우리는 이만큼 모르는 게 된다고 말하더군요. 무한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모르는 부분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완벽히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가 아는 하나님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려 한다는게 문제입니다.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제자가 스승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왜 창조주이십니까? 우리는 결코 그분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나의 경험과 생각을 성경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시간이 바로 큐티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잘 알기를 간구하며,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을 더 잘 알기를 바라며 우리 인생길 앞에 있는 고난과 문제를 하나하나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한 영적유익을 누리는 삶입니다.
4) 본론잇기
오늘 본문 첫구절에서 바울은 "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동족 유대인이 율법주의로 구원을 못받게 된 현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없어지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말합니다. 그러면서 구약에서 중요한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부자, 그리고 야곱과 에서라는 형제를 등장시키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인간의 사공노릇을 뛰어넘어 구원과 구속사를 완성시키는지 말해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오류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함은 우리의 구원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 길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과 장애물 앞에서도 그길을 걸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시간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놀라운 영적유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고집스러운 인간과 현대상황
한 이스라엘 대학교수팀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틀린 것을 찾는 것인데, 빨간 색으로 빨강이라는 단어를 써놓으면 "o", 빨강이라는 단어를 노란색이나 초록색 같은 다른 색으로 되어 있으면 "x"를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살펴보니 같은 색으로 되어 있는 글자를 답할 땐 바로 바로 답했습니다. 그러나 틀린 답은 몇번씩 확인하고 답하느라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스트룹효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문법이 틀린 문장을 골라낼 때 사람들은 문법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에 동의가 되면 문법을 더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실험의 결과는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에 일치하는 모든 것에 즉각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반응을 하면서 더더욱 하나의 생각에 빠져서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을 고집스러움이라고 합니다. 고집의 한자는 굳을 고, 잡을 집입니다. 자신이 잡은 생각으로 굳어지는 것을 의미하죠.
여러분, 요즘 꼰대라는 말이 참 많이 쓰입니다. 구시대적 생각에 갇혀 소통이 되지 않는 고집에 찬 연상의 연배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죠. 그런데 요즘에는 젊은 꼰대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똑같이 소통이 되지 않는데 연상이 아니라 연하의 사람을 말합니다. 이걸 조금 더 정중한 의미로 극단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갇혀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요즘 그런 사람들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특히 요즘 더 그런 성향이 강해진 것 같습니다. 6가지를 포기하는 밀레니엄 세대가 바라보는 80년대 주류를 이뤘던 386세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는 이대남과 이대녀, 지역주의로 나뉘었던 기성세대 정치성향과 편향된 역사관과 정책으로 나뉘는 현시대 정치성향, 부동산을 가진 이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서로에 대한 비난의식 좀 더 생각해보자면 길거리고양이에 대한 찬반, 낙태에 대한 찬반 등 사안과 이슈에 따라서 조율하기가 많이 힘들어진 요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라는 녀석은 우리를 계속해서 고집과 아집이라는 매력으로 이끈다는 건데, 현대에 와서 그런 경향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가까워질 수록 이런 경향을 보일 것이라 미리 경고해주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12) 마지막 날이 되어갈 수록 사람들은 서로 함께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떠나게 되어 서로 잡고 미워하며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더 극단주의적 성향을 띄면 띄지 덜하지는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나의 극단적인 고집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끔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불신앙 - 예수님의 자기비움
오늘 바울은 아브라함도 그러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했냐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날이 계속 지체가 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노년이 되어가는 자신과 아내가 생각할 수록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본가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에 와서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이러다가 애써 정착한 것까지 아들이 없어서 다 잃어버리겠다, 대가 끊기겠다, 넘겨줄 사촌들도 없기에 여러가지 생각들이 든 것이지요. 그래서 두 부부가 생각한 것이 사라가 부리던 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아서 대가 끊기지 않게,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유지될 수 있게끔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한정된 생각의 한계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제한시키는 것이었죠. 그 결과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은 이삭과 후손에게 계속해서 장애물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갈을 통해 나온 자식은 하나님이 원했던 통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나님이 약속한 통로, 약속해놓은 이삭을 통해서 일하겠다 하시는건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 스스로의 환경에 결국 약속이 실현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하니, 나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니 "실소", 웃으며 믿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약속을 했던 사라의 아들 이삭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7-8절입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였으니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나중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삭의 부활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시련을 이겨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사역을 일으키시면 끝까지 밀어부치시는 분이십니다. 그 속에 우리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고, 불신앙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도 일으키십니다. 우리의 상황과 환경의 제약속에서 우리는 신앙과 믿음, 구원의 약속을 잊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네가지 밭비유에서 "세상의 염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한 염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제한적 조건들. 그것들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길 곳곳에 구원의 힌트, 구원을 맛볼 수 있는 기회와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계단들을 마련해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염려를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럼 어떻게 자신을 부인하셨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의 자기부인을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 세상의 염려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구원사역이 보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스텝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나의 구원사역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오늘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3) 이삭의 불신앙 - 예수님의
제가 나중에 시간이 나면 창세기를 소개해드릴 시간이 있다면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간단히 소개해드리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노년이 되어 눈이 안보일때까지 그 말씀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제 생을 마감하고 아들들에게 유업을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시야가 많이 흐려졌습니다. 그 말은 곧 이삭의 마음이 행동으로 그대로 나타날 때라는 겁니다. 결국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못했던 아브라함 정도가 아니라 애써 부정하고 말았습니다. 10-12절입니다.
10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이렇게 계획하셨는데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야곱이 잔꾀를 내어서 결국 자신이 그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악까지도 다스리시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끌어가시는 분이십니다. 리브가와 야곱이 이삭을 속여가는 것을 사용해서라도 말이죠. 여기서 여러분이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죄와 악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구원사역을 인도해가시는데 있어서 죄와 악이 하나님의 손과 권한을 벗어날 수 없는 피조세계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악이 있더라도 그것들로 방해받지 않으시고 그 안에서 놀라운 구원사역을 이끌어 가십니다.
- 그렇다면 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애써 부인했던 것일까요? 이삭은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쌍둥이 아들 둘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에서는 상남자 스타일이었고, 야곱은 가정적인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둘이나 있었는데 이삭의 인생을 기록하고 있는 26장은 그가 흉년을 피해 그랄이라는 곳으로 피신을 갑니다. 곡식이 있는 대도시 애굽으로 가려니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머무르는데 아내도 빼앗길 뻔합니다. 그러다가 그랄 땅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하는데 운이 좋게도 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빼앗겼습니다. 두번째도 팠는데 또 나왔습니다. 그런데 또 빼앗겼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그나마 빼앗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그네 인생의 연속을 살았던 것이 이삭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강한 부족, 강한 리더십, 강건한 아들이 대표가 되길 바라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 당시 장자가 유업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에서를 야곱은 더 좋아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13절입니다. "13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은 그대로 끌고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신앙유형 중 하나가 옛하나님신앙입니다. 자신이 은혜받았던 방법, 자신이 읽으며 은혜받았던 책이나 구절. 내가 해왔던 신앙경험만 붙잡고 사는 것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을 덮어버리면 큰 문제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 약속했는데 정말 약속이 이뤄진 이야기를 모아놓은 구약,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다시 올 것이라고 약속을 하신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신약으로 이뤄져있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구원사역의 약속들로 신앙생활을 해야지 "내가 경험한, 제한된 고집스러운 신앙"으로 생활해서는 안됩니다.
- 우리는 특히 부정적 상황이 펼쳐졌을 때 우리의 신앙이 어떤지 알게 됩니다. 옛하나님 신앙으로 가득 차 있는 고집스러운 신앙인들은 그 고난을 해석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경험했던 것들로 계속 해석을 하자니 결국 옛날 상황에 맞춰서 해석하고 치부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내 마음과 영혼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 찜찜함이. 그게 나중에 고름이 되고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니 해결이 안되는 것이죠. 그러다 하나님 앞에 대성통곡하게 되면 다행인데, 죽을 때까지 그걸 스스로 해결하려고, 직면하기 싫어서 꽁꽁 싸매두는 분은 그게 불신앙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결국 이삭은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알고 에서형에게 맞아 죽을까 하여 외삼촌 라반이 있는 곳으로 야곱을 피신시키기까지 합니다. 그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 하나님은 어떻게든 약속하신 건 이루시는구나. 내가 교만했구나."
나의 고집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아셨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 되셔서 하나님께 끈질기게 간청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라고 안아프실까요? 왜 절망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가슴이 찢어지지 않으실까요. 억울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고, 성전도 분노로 엎으시고. 예수님도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단절되는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주도권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26:42)
예수님은 3번이나 당신이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할 정도로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힘든 길이라는 것 또한 아셨습니다. 계속해서 이 길을 피하고 싶으셨을 겁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까지 하나님께 간청하셨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가시는 이 구원사역이 내가 하기 싫다고 안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꼭 끌고 가시는 것이라면 나는 그 길을 같이 가겠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소망합니다.
- 여러분, 우리가 이삭처럼 끝까지 자기 고집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예수님과 같이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구원사역을 계속해서 끌고 가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구원, 세상의 구원사는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께 항복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뜻이 이뤄지기를 함께 바래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젊은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게 바로 방탈출 카페라는 곳입니다. 그 방에 가면 방에 있는 힌트를 찾아내고 조합하고 암호를 풀어야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떠실것 같아요? 재미있겠죠? 한시간이 지나도 풀지 못하면 그 때 주인이 와서 방을 열어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한시간이 아니라 그걸 풀때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 감옥이죠. 세상에 그런 감옥이 어디있겠어요. 아무리 머리를 쓰고 노력을 해도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 덩어리만 가득한 그 방에서 죽을 때까지 있어야 한다. 소망이 없는 그 방이 곧 감옥입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공평해질 때는 죽음 앞에서 입니다. 죽음은 평화롭고 공평하지만 문제는 죽으러 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골칫덩어리이고 풀리지 않는 문제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마치 아까 말씀드린 풀리지 않는 문제가 가득하면서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는 방 같습니다. 오로지 죽어야만 끝나는 감옥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풀지 못할 때에도 그 안에서 풀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문은 열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못풀지만 하나님은 풀어내십니다. 나는 못나가지만, 하나님이 문을 여실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가득한 이 방을 그래도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내가 구원이 느껴지지 않고, 기독교인처럼 살아내지 못하겠고, 소망이 없고, 앞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높게 더 크게 믿음의 고개를 드시고 눈을 뜨십시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예수님의 구속이, 성령님의 내주교통하심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나의 부활과 내세의 자리와 재판대 앞에서의 변호가 다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평온히, 믿음을 가지고 내게 맡겨진 이 삶의 자리를 잘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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