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그릇으로 세우셨습니다. 유대인에게가 아니라 이방인, 즉 각 족속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말은 한 민족이 아니라 여러민족에게 나아갈 것과 또 천편일률적인 상황이 아니라 너무나도 다양하고도 수많은 변수를 만나게 될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아덴이라는 서양철학과 민주주의의 발흥지라고 볼 수 있는 아테네에 맞게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22-23절을 보실까요?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그들에게 "종교심이 많다"라며 칭찬하는 것처럼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속내는 "미신을 믿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신의 제단"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신의 주장을 시작합니다. 특히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며 그들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사실 다른 곳에서 이러한 태도는 서로 대결의 양상을 낳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토론광장, 즉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문화의 장으로써 얼마든지 가능한 태도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시작했던 것이죠. 그간 예수와 부활을 강조했던 바울이 이번에는 어떻게 복음을 풀어낼지 함께 더 보시죠. 24-29절입니다.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27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29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비신자이자 이방인들에게 나선만큼 "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합니다. 바울이 믿는 신은 모든 것을 만든 자였고, 인간을 필요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오히려 생명을 주려고 만든자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그리스로마신화 문화에 있던 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신관이었습니다. 그 신들은 서로 필요에 의해 싸우고 죽이고 다시 다른 존재로 살아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신은 필요가 없으신 분으로써 오로지 사랑으로 인류를 만드셨고, 그 인류의 경계와 연대를 정해주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신은 인간과 차원이 다른 존재이면서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그래서 신이 은이나 돌에 사람이 새겨서 만들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더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30-31절입니다.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1절에 "정하신 사람"이라는 기준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이 나타나기 전, 그러니까 30절에서 말하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사람들은 신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뿐이었다면, 이제는 어디서든 모든 이들이 "회개하며 올바른 하나님의 모습을 예배할 수 있게끔" 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정하신 때"가 있어 모든 이들이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바울은 말합니다. 그 증거로써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말합니다. 네, 예수가 다시 살아남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고 모든 영적채무가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를 따라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가장 중요하고도 위대한 활동이었음을 바울은 말합니다. 마지막 32-34절입니다.
32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33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34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3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비웃고 조롱하는 부류와 다시 이 "신관"에 대해서 듣겠다 하는 자, 그리고 믿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바울의 사역을 보십시오. 각 도시와 문화, 사고체계에 맞게끔 얼마든지 복음에 옷을 입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또 고민케 하고 마침내 결단케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리하길 소망합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에게 맞고, 어려움에 처한 자는 그에 맞게, 번뇌하는 자에게는 또 그에 맞게 섬길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마침내 그럴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물을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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