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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사도행전_따라가는 길

행 17:16-21

by 우루사야 2023. 9. 5.

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근거지인 소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 지방, 유대문화가 덜 하고 이방문화색채가 더 강한 지역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여러도시들에서 각상황에 맞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다가 이번에는 더 남쪽 아덴이라는 곳에 당도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이 도시의 특색을 살피며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안그래도 바울팀 중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두고 온 상황이었기에, 팀의 힘이 약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또 다른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며 나아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6-18절입니다. 

1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아덴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현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말합니다. 예로부터 그곳은 고대철학의 중심지이자 민주주의의 발흥지이기도 했지요. 그곳에 도착한 바울은 2가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첫번째로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아테네에는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리울 만큼 고대인들의 힘과 기술로는 짓기 힘들다고 생각될 만큼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도 있었고, 토론이 일상화된 도시이기에 많은 주랑이나 광장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등학문을 연구한 자로써 이러한 문화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매료되며 학자로써 이런 환경을 즐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도시를 바라보며 격분하였다고 누가는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불교사찰이나 타종교의 것들을 보면 바울과 같이 분노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영성과 예술성을 가지고 아무런 능력과 효능이 없는 우상들에게 쏟아붓고 있음으로 말미암은 분노와 하나님 아버지에게 드려야 할 사랑을 다른 것에 팔려 마음을 헛된 것에 쏟아붓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악의적이고 비인격적인 타종교에 대한 분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상에 빠져있는 이들을 향한 연민과 동정, 그러면서도 죄에 대한 분노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그렇게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하여 바울은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18-21절입니다. 

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9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20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21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여기서 바울의 사역의 특징을 다시금 고민하게 됩니다. 첫번째로, 18절과 같이 바울은 오로지 "예수와 부활"을 전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의 성취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성경, 그 성경의 성취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내 마음에 두는 것이 하나님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람을 향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이, 가족이, 친구가, 지인이 하나님께 사랑받게끔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물질의 복을 주는 사랑정도로 폄훼되어서는 안됩니다. 부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하는 사랑이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나는 이들과 대화하며 때로 토론까지 합니다. 말쟁이라고 불리울만큼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말을 걸고 또 생각을 나누며 복음이 가지는 우월함과 위대함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마침내 19절과 같이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라는 답변까지 얻어내는 바울이었습니다. 특히 신이 멀리 있다며 쾌락을 강조한 에피쿠로스파 사람들과 이 세상 모든 것이 신으로써 운명은 정해져있다고 말한 스토아파 사람들이 함께 논의할 정도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굉장히 매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바울과 같은 학식과 토론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나를 통해서 잘 드러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나의 성실, 인격, 전문성, 친밀함, 말주변, 손길 등 많은 통로를 통해서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웃들을향해 예수와 부활이라는 놀라운 단어를 전할 수 있는 복음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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