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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사도행전_따라가는 길

행 17:1-9

by 우루사야 2023. 9. 4.

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투옥사건을 겪고 바로 데살로니가로 이동하게 됩니다. 항소를 하기 위해 로마로 가기보다 억울하더라도 감옥에 있었고, 옥에서 풀려날 때에는 일부러 상관들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따져서 자신이 빌립보를 떠날 때 남은 신자들이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해를 입지 않도록 지키고자 했던 바울이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복음과 신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새로운 도시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도 그는 환란을 만나게 됩니다. 빌립보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그의 사역을 인도해가시는지 함께 살펴보죠. 

1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4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빌립보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바울팀입니다. 빌립보에 이어서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나아가게 되는데 여전히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바울입니다. 2절에서 보니 "자기의 관례대로" 그러니까 안식일마다 예배당에 찾아가는 습관대로 데살로니가에서도 회당장을 찾고자 했다는 것이죠. 빌립보에서는 회당이 없으니 강가로 갔고, 거기서 루디아라는 동역자를 발굴해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회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바울의 행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이방인을 향해 가야 한다는 비전"만큼은 확실했습니다. 드로아에서 바다를 건너 빌립보에 왔고, 빌립보에서 투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곳에 머물고자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움직였지만 바울에게 우선은 복음이었고, 그 결과로 4절에서 보니 열매로 얻게 된 신자들의 무리 중 첫번째가 경건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는 "그리스도 신앙"은 분명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한 바였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었으며, 그 해설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이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지유케 했습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의 사역이 이방인의 사역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사역했으나 반응을 보인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분명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로, 유대인들은 구원을 주는 복음에 대해서 시기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진 구원의 기회가 오히려 이방인에게로 넘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사역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이지요. 5-9절입니다.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7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8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9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킵니다. 마치 바울팀이 데살로니가 도시를 혼란스럽게 한것처럼 선동합니다. 특히 6절에서 보니 "천하를 어지럽게"했다고 하며, 더 나아가 7절과 같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 즉 반역죄를 저질러 다른 황제를 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반응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번째로 유대인들과 깉이 시기와 분로로 가득차서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6절과 같이 "읍장들"에게 달려가 정치적 권한으로 억누르려 합니다. 그래서 바울팀을 영접했던 야손이라는 자를 무력으로 끌고 나와 재판받게 하려 합니다. 두번째 반응은 이 도시의 읍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무리들을 잠재우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를 가두던 자들이 무력으로 무고하게 투옥시키고, 다음날 몰래 그들을 내보내려고 "도시에서 떠나달라고 간청" 했던 것처럼 말이죠. 데살로니가 관원들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분노하는 무리를 잠재우고 바울팀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도시를 조용하게 유지하는데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예수가 이 세상의 영적원리를 뒤짚으셨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에 더 흥미를 느끼고, 어떤 흐름에 나의 본능이 반응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인생이 주인이 되고자 복음 앞에서 분노와 시기, 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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