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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사도행전_따라가는 길

행 15:22-29

by 우루사야 2023. 8. 28.

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인이 그 당시 온 교회가 모여 함께 논의하고 중재할 정도로 이방인구원의 문제는 당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마침내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교회생활하는데 있어서 중재안을 주고, 이를 들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22-24절입니다.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23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24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이 문제가 굉장히 중요했기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 장로, 주요교회구성원들이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과 함께 유대인과 함께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피해야 할 몇가지 권면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을 보니 바울과 바나바가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 구성원이었던 유다와 실라를 함께 보내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동의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안디옥교회에 은밀하게 와서 예수를 향한 믿음말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들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음을 의미하기도 한 것이죠. 이러한 결정은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그 근처에 있던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금 지도로 튀르키예 나라 전체에 있던 교회들에게 전하게끔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유다와 실라는 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직접 말하고 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교회는 파송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문제를 얼마나 진중하고 신중하게 다루고 있는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중요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돌아보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로써 내가 지금 구원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결코 내 노력으로 신앙생활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뤄놓으신 것들을 발견하고 찾으며 감격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나의 일상, 직장, 가정, 교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이뤄놓으셨다는 그 복된 소식을 발견하는 삶, 그것이 구원임을 하루하루 증명하며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25-29절입니다. 

25-26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27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예루살렘교회는 이러한 결정이 결코 예루살렘 교회로의 권력집중화를 이루기 위함이 아님을 밝힙니다. 28절에 보니 "성령과 우리는"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구원을 이루심을 밝히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회의 구성원들에게 감동감화 하셨습니다. 하나로 마음 모으게 해주시니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상의 제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우상은 말 그대로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에 대고 인간이 허망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우상이기에, 그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허망한 것에게 빌기 위한 제물이 됩니다. 죽음처럼 허망한 우상에게 제물을 바쳐진 것을 삼가게 합니다. 피 또한 생명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피흘리는 것을 죽음으로 보셨기에, 유혈이 일어날 때 유대인들로 하여금 정결의 시간을 갖게끔 하셨습니다. 그래서 피흘리는 것을 멀리하게끔 하셨습니다. 목매어 죽은 것은 오히려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은 것을 말합니다. 그럼 이것은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생명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것은 피째 고기를 취하는 것이 되기에 이것 또한 죽음에 가까운 것입니다. 성은 하나님이 새생명을 낳을 수 있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신 성스럽고 고귀한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쾌락 더 나아가 비인격적인 통로로 쓴다는 것은 생명과 반대되는 일이기에 이것 또한 멀리할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생명을 가까이 하고 죽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권면인 것이지요. 

그런데 29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삼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법이 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이루어졌고, 우리는 그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절제하고 스스로 삼가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3-4가지의 권면을 예루살렘 회의는 법규가 아니라 권면으로 내리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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