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베드로는 종교핵심관계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변론을 했습니다. 죽은 예수의 이름이 어떻게 지금 현실에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지를, 유대교 경전과 핵심 교리 안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 그들이 믿는 구약성경에서 약속하고 예견된 일임을 베드로는 그들 앞에서 해설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더 치열하게 공부하고, 더 치열하게 투자하고, 더 치열하게 살아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완성했다고, 그 완성된 인생을 이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나사렛 어부출신이지만, 그의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확신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어떻게 이어가는지 오늘 본문 속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의 변론을 들은 공회원들의 논의장면부터 시작합니다. 13-17절입니다.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18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의 변론에 그들은 맞받아칠 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구약성경 해설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복의 근원약속도, 모세와 사무엘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도 모두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그들을 풀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성전에 앉은뱅이가 유명했던터라 그 앉은뱅이가 일어난 이 사건 또한 모두에게 알려져서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도 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던 것이지요. 사실 이렇게까지 되니 이 두제자를 잡아들여 공의회를 연것 자체가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스스로의 꾀에 스스로 빠져버린 것이지요. 결국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말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습니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말이지요.
여러분. 그런 점에서 교회와 신자는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죠.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 교회와 신자는 세상을 섬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자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예수를 부인하며, 성령과의 교제를 막는 악한 영"을 상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악한 영은 저절로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싸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과 섬김, 희생"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큰 일을 따라 하는 것만이 악한 영을 내모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큰 율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소개해주신 것이지요. 우리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른 능력과 힘으로 살아가는데 치중하게 된다면, 우리도 저 유대교지도자들처럼 "할말이 없는 인생, 무엇을 붙잡아야 능력이 있는지 모르는 인생,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한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오히려 입다물라고 말하는 피폐한 인생"을 살 수도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의 능력이 없으면, 오히려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를 시기질투 할 수 있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19-20절입니다.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최종판결로 예수의 이름으로 활동하지 말라는 조치에 대해서 이와 같이 담대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감으로 예수의 이름이 살아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특히 성전앉은뱅이 치유사건을 통해서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겠지요. 그렇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서 움직이고 계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을 그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과 인간의 말 중에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옳은지 따져보라!"라고까지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본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영이시기에 우리의 물리적인 시각, 촉각, 청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판단해보라"는 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판단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보고 들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그들은 무엇을 보고 들은 것일까요? 그들의 마음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베드로와 요한이 같은 마음 한마음으로 일하게 해주시어서 순종했더니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런 일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들도 당사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앉은뱅이 관계의 일을 보고 들은 제 3자인 것이지요. 그것을 그들은 증거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제3자가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경제가 문제입니까? 하나님과 나의 경제권 사이에 일이 일어나게 한 발 뒤로 빠지십시오. 그리고 가족문제입니까? 하나님과 나의 가족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 발 뒤로 빠지십시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이렇게 지켜보십시오. "예수의 이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자"고 말이죠. 예수라는 새로운 시대에 예수는 예수의 제자들의 삶을 어떻게 보존시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지 지켜보자고 말이죠. 그렇게 제3자가 되어가십시오. 그렇게 예수의 이름은 여러분의 가정, 직장,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일"들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 21-22절입니다.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22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결국 베드로와 요한은 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제자공동체는 이 일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앉은뱅이의 치유로 앉은뱅이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듯이, 베드로와 요한의 석방으로 제자공동체는 거대했던 벽과 같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넘어섰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 인생에도 큰 벽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벽보다 크신 분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벽들을 하나하나 넘어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