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bV4HsuNysCc&t=450s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바울은 18절에서 분위기를 전환시키면서 "현재"라는 단어를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장차"라는 미래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해보자는 것이지요. 미래는 분명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영광스러운 시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시간은 "고난의 순간"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사건을 겪으면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습니다만, 그 사건은 그 자리에서 끝나고 그는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살아내야 할 앞으로의 시간은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했으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헌신과 유대인들과의 갈등과 논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변화산에 그대로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수제자들이 삶을 살게끔 그 산에서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이 고난의 삶을 살게끔 하신 것이지요.
신학 중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문구는 "이미와 아직 사이"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에서 이미 구원이 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육신의 죽음을 겪지 않았기에 구원이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의 존재는 살아내면서 구원의 확실함을 믿음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고난의 삶입니다. 예수님도 참 인간이셨기에 구원의 확신을 아셨지만 십자가 고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지만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사 베드로는 새예루살렘의 한기둥으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지금 고난이라는 물 한그릇은 장차 우리가 겪게 될 바다같은 영광에 비할바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죄악된 아담, 죄로 물든 인류가 영광을 누리는 그 날을 통해 본래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명, 하나님나라를 세우라는 그 명령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감탄은 완벽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과 같이 말합니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담이 본래 받았던 권한을 위임받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는 것", 즉 선한 왕으로 모든 피조물은 번성케 될 것을 기대합니다. 아담의 선악과 죄는 개인적 죄가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죄, 전지구적인 죄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로 인류는 정죄받았고 피조물 또한 정죄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굴복하게 하시는 이가 있어서 피조물이 굴복하게 되었다"고 20절에 말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정죄로 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로 인해 다시금 회복되었습니다.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21-22절입니다.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아담의 죄가 전지구적이듯이, 두번째 아담 예수의 회복도 전지구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창세기 1장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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