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오늘도 성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오늘도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라며, 오늘 말씀 가운데 깨닫게 해주실 하나님께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0-11절입니다.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법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행이다!"라는 과격한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너무나 무섭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기능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면서 율법에 "희생제사"도 주셨습니다. 즉 백성은 율법을 지키려 애써야 하며, 동시에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받을 희생제사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규칙과 용서를 함께 율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잠시 한번 더 생각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제사를 드려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받고 죄를 해결했을 뿐이지, 인간은 또 다시 죄를 짓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율법을 지키러 나가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으며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결과가 아니라 방향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정 반대입니다. 12절입니다.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들은 율법에서 죄인이 되었다가, 제사로 죄를 해결했다가 , 다시 죄인이 되었다가 제사로 해결했다가... 이 일상의 도전과 반복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계속해서 의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주시면서, 방향을 살아내라고 하신 것이지 결과물을 만들어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믿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예배와 십일조를 믿으시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내가 예배를 잘 드리고, 십일조를 철두철미로 지켜내야 신앙생활 제대로 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 그렇게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렇게 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만 가지고 있어도, 그 의지만 가지고도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좋고 사랑스러워 예배하며, 예배하기 위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헌금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이 가장 중요합니다. 13절입니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럼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나의 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죄를 짓고 얼렁뚱땅 하나님께로 방향만 돌리고 있으면 하나님은 속으신다는 겁니까? 여러분이 죄를 향하고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중간과정에 예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하게 죄짓지 말아야지...하고 돌아설 수 없습니다. 사람 마음이 그리 쉽게 변한답니까?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예수가 당하는 형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죄에 대한 심각성을 알아가며 죄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는 예수를 바라보며, 그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우리는 감사와 예배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은 "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계획하셨던 것이지요. 14절입니다.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의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유대인이어야만 한다거나, 어디 소속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만인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그 중심점이자 구심점을 유대인이 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잘 살아내 이웃에게 전파했어야만 했는데 그들은 불순종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인 중에 하나님이 예수로 태어나셔서, 이 삶을 살아내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셔서 이 삶을 살아내십니다. 믿음과 의로움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대로 살아내십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이 양심을 가진 누구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이 선택받아 이방인에게까지 조건없이 전달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유대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방향의 믿음 말고도 결과물로서의 율법지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율법없이 의로움을 받았고, 유대인 선조들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않아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살아왔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율법의 완성되시는 예수를 통해서 "완벽한 양심과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성령 하나님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다른 구원의 조건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똑바로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여 예배하며 헌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알아서 하게 되니까요. 그런 점에 오늘 하루도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승리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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