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오늘도 성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이 자신이 믿는 복음이 무엇이며, 또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해준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을 통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참 복음이 무엇이고 다른 복음은 무엇인지 구별하게끔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합니다. 11절입니다. "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어제 바울은 베드로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복음 앞에서 같은 사역을 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듯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 바울과 베드로 모두 "예수의 종"이라는 사실에 서로 악수하였고, 이것은 주의 형제이자 초대교회의 수장 야고보 그리고 주님이 사랑했던 사도 요한과도 이러한 동역자로서의 협력을 논했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한발자국 더 나아가 베드로의 실수까지도 언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죠. 12-13절입니다.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가 바울이 있었던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아무래도 이방인들이 많이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어느날 예루살렘 교회수장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몇 사람이 안디옥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있다고 하는 곳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그 때 베드로는 무언가 실수한 사람처럼 급하게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행동은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바울의 멘토격이자 인도자였던 바나바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멀리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이방인이 사는 지역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본래 율법에서는 이방인의 우상숭배 문화를 이스라엘 안으로 들이지 않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과격하게 적용하여 이방인을 경멸하고 증오하기까지 이르렀고, 자신들만이 선택된 민족으로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민족으로 태어나셔서 이 틀을 깨부수셨습니다. 이방마을에 가셔서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병균이 옮을 수도 있는 환자를 만지면서 치유하시고, 창녀와 세리들의 집에 가셔서 함께 교제하셨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는 차별이 없음을 말씀해주시는 것이지요. 오로지 차별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유대인들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겁니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유대인들이 온다고 하니 그것으로 자신이 질타를 받을까 하여 피했던 것입니다. 이방인을 하대하고 만 것이지요. 그 속에 있었던 이방출신 기독교인들은 상처를 받았겠지요.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야고보로부터 보냄을 받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익히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눈치를 베드로가 보았다는 것은 아직 유대출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방인 출신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극복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겠죠. 이런 베드로의 행동을 바울은 비판하고 나섰던 겁니다. 14절입니다.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서 첫번째,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삶이 아니었다고 비판을 합니다. 두 번째, 유대인답게 이방인답게 산 것도 아니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살면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고 질타를 가합니다. 이방인과 만날 때는 이방인을 존중하는 것처럼 하다가 유대인들이 함께 있으면 이방인을 존대하지 않았으니 비판받아 마땅하지요. 특히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부분이겠습니다.
더 나아가 지금 바울은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는 자들의 행태가 베드로와 바나바의 행태와 같았고 그것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베드로와 바나바가 그것을 반박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죠. 즉 갈라디아교회에 있는 율법을 강요하는 이들이 틀렸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5-16절입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을 미리 받은 유대인이나, 율법을 받지 못했던 이방인이나 모두 죄인이었고 구원의 길이 허락되지 않았었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은 그나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이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울을 가졌을 뿐이었습니다. 거울은 얼굴에 묻은 때를 볼 수 있게 해줄 뿐이지, 물이 있어야 그 때를 씻길 수 있는 것이죠. 율법은 거울일 뿐입니다. 씻을 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죄를 씻을 수 있는 생명수, 보혈을 주시는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예수를 믿는 모두가 죄씻음을 받을 수 있게끔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율법보다 더 큰 혜택으로 예수가 왔기에, 예수를 가진 이방인과 유대인은 차이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아직도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독특한 존재라고 말하는 이들은 예수가 하지 못하는 일을 율법이 할 수 있고, 그 율법이 구원을 준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베드로와 바나바의 외식이었던 것이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회 식사권을 가진 자와 그 식사권을 가지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두 사람 모두에게 연간식사권을 줍니다. 그럼 그 두 사람에게 차이가 있을까요? 없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심으로써, 믿는 모든 사람들이 같아질 수 있게끔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수장격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는 행동들을 한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겠지요. 신자된 우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내게 더 필요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인생이 아니라, 완벽하고 완전한 은혜의 선물인 구원을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 감사로 다른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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