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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마태복음_명예로운 삶

마11:20-30

by 우루사야 2022. 6. 16.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증거들이 아무리 나타나고 세례요한이 아무리 증거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지혜가 없는 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이었고, 나타난 일들을 볼 눈을 스스로 가린 자들이었고, 마음이 악독하여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이중성을 가지고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귀신들렸다 하거나 방탕한 자로 치부해버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지성, 마음, 귀, 눈 모두를 막아놓고 결국 스스로의 가치기준과 판단으로만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런 교만한 문화를 가진 도시들을 비판하고자 하십니다. 20-24절입니다.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여러 도시들이 등장합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은 타락한 도시들로 등장합니다. 긍정적 비교대상으로 두로와 시돈을 언급하십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에 예수님이 베푸신 사역적 노력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시며, 이 노력을 두로와 시돈에 했다면 그들은 이미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가버나움은 고대도시 소돔과 비교하시면서 예수님이 소돔에 사역했다면 의인 10명이 없어 망한 소돔이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가버나움은 그 때 소돔보다 더 천국의 증거들에 대해서 귀를 막고 있다는 의미지요. 우리가 사는 지역의 문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도시의 문화도 또 있습니다. 어떤 도시들은 불야성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도시들은 고요함을 추구하는 도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은 이웃간의 보이지 않는 서로의 규칙이 있습니다. 문화가 있습니다. 과연 그것들은 선합니까 악합니까? 시민의식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면 시민의식이 됩니다. 도시의 타락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범죄하면 도시의 타락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기에 한 개인을 판단하시기도 하시지만, 한 공동체, 한 도시 전체를 판단하시고 정죄하시고 심판하시기도 하십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도시가 되기를, 시민의식이 높은 도시가 되기를, 사랑이 있는 도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이제 가르침을 마치시고 기도를 올리십니다.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5절에서 이것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주제로 가지고 있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에 대해서 자신이 지혜롭다고 슬기롭다고 여기며 교만하게 자신의 판단기준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숨기셨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한 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겸손한 자를 어린아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되시게 여기며 긍휼을 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어린아이 된 인류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다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아둔하고 미련하여 어디로 가야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지 아무리 알려주고 가르쳐줘도 알지 못하는 고아와 같은 인류를 향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간다리 역할로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뜻에 어린아이와 같이 믿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겸손함이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준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겸손해야 합니다. 다른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 겸손함을 가진 자에게 "천국복음이라는 계시, 하나님 아버지라는 계시,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라는 계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일생에서 겸손이 무엇인지, 긍휼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기준으로 두고 28-30절과 같이 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기준이 쉽고 가볍다고 해주십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세속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 더 쉽고 좋고 편해 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좁고 험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여기서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깨닫고, 천국에 나의 집이 있음을 알게 되고,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길은 넓은 문에 비해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 아니게 됩니다.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움이 있어도 더 큰 기쁨과 감격이 있는 길임을 믿고 확신하기에 가야만 하는 길이 되는 겁니다. 그곳에 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짐을 함께 져주십니다. 온유와 겸손함을 가지고 우리와 따스하게 동행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겸손의 기준이 됩니다. 그 기준에 부합되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삶, 가치, 일생을 묵상하시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실 수 있는, 그래서 명예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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