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인류를 향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명예로움을 가지고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식일에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명예롭고, 생명력넘치고,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존재로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보다 크신 분이시고 안식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니,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과 형제인 우리도 안식일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사역을 하십니다. 병을 고치신 것이지요. 율법교사들 입장에서 율법을 범하고 잘못을 저지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동이라 생각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9-10절입니다.
9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10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율법주의로 가득찬 사람들이 예수님의 꼬투리를 잡으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맞냐"라고 묻습니다. 때마침 근처에 한 쪽 손이 병든 사람이 있었고, 고칠테면 한번 고쳐보라는 식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는 것도 모자라 더 한 일도 해보라는 식이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겠냐는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십계명 4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실 때 하나님의 강조점은 그 뒤에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에 있습니다. 네가 움직여 땀흘려 벌어들인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7일을 모두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하고, 그것을 7번째 날에 일주일에 한번씩 기억하며 살라는 의미이셨습니다. 아무 일도 하는 것이 강조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주심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의 복락을 주십니다. 그 증거로 병치유를 하시는 것은 더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복을 기억하기 위함인데, 그 복이 안식일에 나타날 수 있다면 그것을 더 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예수님은 그 복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11-13절입니다.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양이라는 생명도 살리면서 사람을 살리는 천국의 복이 나타나는 것은 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안식일에 하나님의 복이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원하고 바라던 바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복이 나타날 수 있도록 사역하십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쉽게 설명해보면 예수님이 한강에 나타났다고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거기에 재림하셨는데, 주일성수를 하기 위해서 예배당에 있는 것이 맞을까요?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말이죠. 지금 예수님께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천국의 복음, 안식일의 복의 증거를 보여주고 계시는데 안식일이라는 메뉴얼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눈가리고 아웅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이들은 결국 예수님을 귀신의 힘으로 사역하는 자라고 폄하했던 것에서 나아가 이제는 어떻게 죽일까 서로 의논하기까지 합니다.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하는 이들을 피해 길을 떠나십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천국의 증거로 병을 고치게끔 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의사, 병고치는 치유자로만 인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대표자요 왕으로, 섬김의 인자로 드러나길 원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잘못된 소문이 퍼져가지 않길 원하셨습니다. 이에 마태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구약에서 미리 예언되었던 메시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메시야는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었고 그것으로 보면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 밖에 없다고까지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7-21절입니다.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앞으로 700여년 후에 메시야가 나타날 것인데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첫번째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와 같이 "내가 기뻐하고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려왔듯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님이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음을 밝히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심판을 알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써 그 심판의 대상은 이방, 그러니까 온 세계였습니다. 온 세계의 기준이 되고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21절과 같이 온 이방들이 예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기준이 되러 오셨고,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날에 기준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한 자들은 그 기준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 심판을 지나가게 될 것이고, 예수와 함께 하지 아니한 자는 그 심판에 참여하여 결국 정죄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라는 자격을 제시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가 내 안에 계심을 인정하며 함께 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예정된 그 메시야는 오셔서 어떤 자로 오셨습니까? 시끄러운 무리를 동원해 인기몰이를 하러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누군가를 짓밟아 왕의 자리를 차지하러 오신 분도 아니셨습니다. 조용히 오셔서 상한 자를 고치시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천국부활과 소망을 주셨으며, 정죄받았다고 격리되었던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러니까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이 나라의 국운이 다했다는 상황 가운데서 이런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이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금 세워질 것이라고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 어떤 절망, 어떤 문제 속에 있더라도 우리는 명예로운 하나님 나라의 자녀요 상속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와 형제요, 율법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이웃을 섬기는 율법 중 최고의 율법을 자유롭게 누리며 명예롭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강해설교 > 마태복음_명예로운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12:38-45 (0) | 2022.06.22 |
---|---|
마 12:22-37 (0) | 2022.06.21 |
마12:1-8 (0) | 2022.06.16 |
마11:20-30 (0) | 2022.06.16 |
마11:12-19 (0) | 2022.06.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