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늘 조심스럽게 말하고 행동하십시오.13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약2:12)
나는 한 때 복음이 주는 자유함에 감격에 취해 너무나도 자유스럽게 보낸 시절이 있다. 예전에 했던 방종과 방황과는 다른 자유함이었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함인데, 돌아보면 그것은 미성숙한 복음의 확신에서 오는 반응 또는 딱딱한 예전, 보수적 종교생활 등에서 오는 반감이 포함이 되어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신앙이 두터워 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의 언행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기니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니 타인에게 긍휼과 자비함을 가지게 되고, 그것은 자연스레 나의 자유함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나는 타인을 사랑하게 되고 자연스레 율법을 지키게 되었다.
이런 성화의 과정은 놀랍도록 신비하다. 타종교에서 말하는 "선"에 대한 주입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의식 중에 무언가를 깨닫거나 얻게 되어 존재자체가 변화되는 것이 타종교의 일반적인 종교적 성화의 설명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선한 존재로의 변화는 다른 식으로 설명된다. 하나님께서 심겨두신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에 대한 의식, 존중, 경외함으로 발전되고 그럴수록 행동으로의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긍휼(사랑)과 자유가 밸런스를 이루며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민수기 19장이다.
19 3일째 되는 날과 7일째 되는 날에 깨끗한 사람이 그 물을 부정한 사람에게 뿌려 7일째 되는 날에 그를 깨끗하게 할 것이며 그 사람은 자기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 날 저녁에 그가 깨끗해질 것이다.20그러나 부정하면서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 자는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이것은 그가 나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않았으므로 그 부정이 그대로 있다.21이것은 너희가 영원히 지켜야 할 규정이다. 그리고 그 물을 뿌린 사람도 그 후에 자기 옷을 빨아야 한다. 누구든지 그 물을 만지는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다.22또 그 부정한 사람이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부정한 사람이 만진 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죄를 인식하고 부정하게 된 사람에 대한 구절이다. 그를 정결케 하기 위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과 연관된 물건들까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것을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며, 타인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기 위함이다. 부정한 사람을 정결케 하기 위해 물을 뿌리는 자를 생각해보자. 그는 부정한 자를 위하여 물을 뿌림으로써 자기 옷을 빨아야 하는 수고로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저녁까지 자신도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과 격리되어야 하고, 물건을 만져서는 안된다. 왜 그래야 할까?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부정함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까지 부정함의 상황에 들어감으로써 이제 정결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살을 맞대고,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죄와 죄된 문화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 죄는 퍼지기 마련이고, 죄는 서로 수군수군하게끔 만든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서로 정결케 해야 한다. 나의 죄는 어느샌가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때문에 우리는 언행에 자유와 방종보다 조심하며 서로의 죄가 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공동체적 삶이 될 것이다.
그런데 때론 살아가다보면 관계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끝까지(이른번씩 일곱번) 사랑해야 함을 예수님께로 배운다. 그러나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이 생기기도 하기에 예수님은 마18장에서 3번의 공동체적 권면을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즉 단칼에 관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정결함"을 위한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정결하게 유지되게끔 하기 위해서는 한 개인을 관계적 격리 또는 공동체적 소외를 시켜야 할 때도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깊은교제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지 악의적 소외 또는 왕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한 자가 정결해질 때까지 가지는 혼자만의 시간과 활동의 자제와 같은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격리되는 자나 격리시켜야 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중요한 아이디어가 있다.
11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56:11)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더 큰 맥락과 근원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스스로 격리를 감당하는 자, 주의 몸된 공동체의 정결함을 위해 누군가를 격리시켜야 하는 자. 이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사람에게서 떨어지는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은 고통과 고난의 시간까지도 준비하시어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57:2)
오히려 이런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정결과 부정에 대해 관심이 없고 스스로 거리낌 없이 방종과 자유함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들에게 오히려 복음과 그리스도는 장애물이 된다. 경건과 정결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자신의 존재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자신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꼴이다. 이사야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될지 말해주고 있다.
14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15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20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21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복음을 가지지 못한 자는 사람에게 매이고 쫓기고 갈등으로 매몰되기 마련이다. 사람이 주는 영향, 사람이 주는 생각, 사람이 주는 기쁨이 그에게 독이 되고 아픔이 되고 죽음이 된다. 그러나 복음은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하나님의 정결함을 따라가게끔 한다. 그리고 그 정결함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긍휼과 사랑이 넘치게 한다. 9장에서는 메시야된 복된 그리스도를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다. "5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우리네 인생길이 어떤 길을 걷게 할지 결정은 본인의 몫이다. 복음은 주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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