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민20:14-17)
하나님의 선별은 그들의 삶을 규정짓게 한다. 이스라엘을 택하심으로 그들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고 더 나아가 주변국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심판 지팡이 국가가 된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다. 출애굽당시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인간과 동물은 사실상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선별하심으로써 피할 길을 주심으로 그들은 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처음 것은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그것을 레위지파로 옮기신 것이다. 그 때문에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는 지파가 되었다. 하나님의 구별하심은 그 이후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설정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적 절차에 따른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선택받음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들을 말한다.) 자신의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서 하나님의 큰 틀이 있다고 믿는 자이다. 자유와 방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의 선택에 감사하며 자신의 삶의 한계를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요 궁극적 자유임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3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약 3:3-4)
감정, 의지, 생각, 행동을 제어하고 다스리고 잠잠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삶의 질이 다르기 마련이다. 기독교인은 성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신을 다스리게 된다. 말도 재갈로 순종케하고, 배도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움직이듯이 말이다. 성령님으로 나 자신을 제어하여 순종케 하는, 그 한계를 스스로 가지고자 하는 삶. 그것이 구별된 자의 삶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자인가? "13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사9:13) 여기서 예정과 견인의 교리를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어쨌든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자신이 기독교인이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의 한계를 방종으로 치닫게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18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19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20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21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한계가 있는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 단호히 말한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스스로 자멸할 것이다.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삶은 불타오르듯이 사라질 것이며, 어디를 가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갉아먹으며 살아간다.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 안에서 자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지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지옥이며,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것이 지옥이다. 본인이 사역을 돌아보며 한편으로 안타까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 청소년 청년 사역을 하며 "은사와 재능"을 "부르심"으로 직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만드신 의도와 뜻을 알고 그대로 은사와 재능으로 발현시키는 것은 맞다.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들어진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더 있어야 한다. 나의 은사와 재능이 발현되는 주체는 나의 감정과 생각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혼으로의 부르심, 자녀를 낳지 않는 것에 대한 부르심이 요즘 그리스도인 청년들 사이에서 늘어나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합리화하고자 한다. 자신의 욕구를 종교적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자신의 생각과 의지, 감정을 돌아보아야 한다. (물론 진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 맥체인 본문에서 유난히 드러나 보이는 무리가 있다. 바로 통치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다. 그들의 방종에 대해서 시편과 이사야서는 각각 이렇게 말한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시58:4-5)
1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15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16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사9:14-16)
시편기자는 동시대의 통치자들이 술객, 즉 자신에게 주권을 준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독을 뿌리고 다닌다고 고발했다. 이사야도 통치자가 되는 장로,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선지자를 모두 비판하며 그들은 끊어질 것이고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이 함께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힘을 가진자들의 방종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에 영향권 안에 있는 자들이 모두 피해를 입게 될 것을 성경은 고발하고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권면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
스스로 자처하며 잘난체하며 나서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리더가 되고자 해서는 안된다. 숙고하며 고뇌하며 과연 본인이 리더인지, 그리고 하나님께 귀를 열고 있는지,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는지를 야고보는 묻게 만든다. 선생, 리더, 장로, 목사, 권력가와 같이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택함으로 서게 되는 자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조심해야 할 자리임에도, 더 나아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더 큰 매를 맞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16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17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59:16-17)
방종스런 자유보다 요새 안에서 누리는 안전한 자유를 나는 원한다. 그 안에서 악인의 심판과 멸절을 보게 될 것이고, 나는 아침마다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종말의 날에 나는 더 큰 안전을 확신하며 하나님 안에서 찬양하게 될 것이다. 구별된 자가 살아갈 요새 안에 가장 큰 기쁨과 자유함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게끔 지금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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