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수원 삼성의 한 선수의 플레이 영상을 보았는데 쭉쭉 뻗어가는 롱패스 모음영상이었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패스를 할 뿐만 아니라 드리블 또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여유롭게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었다. 넓은 시야를 가진다는 것은 플레이 자체를 여유롭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요즘 육아와 사역, 일상의 루틴 속에서 조율을 하며 하나하나 맞춰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직 맞춰지지 않음에 따라 나의 격동하는 감정과 언행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다. 왜 이리도 진정이 되지 않을까, 왜 이리 나는 격동할까. 어찌보면 이러니 사람이지 하면서도, 이런 인격으로 과연 나는 담임목회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찌되었든 이런 고민의 시간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이것이 넓은 시야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귀한 훈련의 시간임을 고백한다. 기도를 마친후에 집에 가면서 갑자기 모세를 생각하게 되었다. 120년 인생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것이 80세인데, 그럼 인생의 2/3 지점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그런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럼 내가 80-90세를 산다고 하였을 때 50대 정도에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인데. 그럼 모세는 40세부터 80세까지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아마 광야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그것이 자신의 인생임을 받아들이며 일상을 살다 양을 칠 때 하나님을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만났을 것이다. 지금 내가 그러하지 않은가. 내가 이대로 50대에 접어든다고 하였을 때 나는 어떤 마음일까. 버젓한 목회지 없이 이대로 산다고 했을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일상을 살 수 있을까. 마음을 비우게 된다. 하나님이 부르셔야 사역을 하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들을 대신하여 내가 레위인을 구별하였다...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갈 때 재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다. (민8:18,19b)
민수기에서는 레위인의 역할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 나오다가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 설명한다. 레위인들이 종교적 장자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종교적 거룩함의 약속을 충분케 하는 것이다. 그들의 부르심은 명확하다. 레위인 사이에서도 직급의 차이, 노소의 차이가 존재하여 활동하며 은퇴하는 시기(30-50세)도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명확하게 있었다. 그들의 삶은 정해져있는 것이다. 목사의 삶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비전, 나의 야망, 나의 욕망의 장으로 목회지로 가고 있지 않은가. 고민해본다. 어제 처음으로 큐티모임 시간을 가졌다. 예정되지도 않았고, 충분히 준비되지도 않았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래도 내가 아는 말씀을 묵상하는 법을 함께 공유하며 나아갔다. 어떤 피드백이 있을 지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고 싶었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목사의 가장 첫번째 역할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먹이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를 버려 수치를 당하게 하셨으며 우리 군대와 함께 출전하지 아니하셨습니다.(시44:9)
한국 기독교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더이상 일어날 수 없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의 사람들이 돌고 돌 뿐이다. 비신자가 기독교로 오기 위해서는 많은 편견들을 해소시켜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 한 개인으로써 이런 상황은 이전에는 너무나도 나를 힘들게 했다. 내 야망을 채우기 위해 기독교란 배경이 점점 장애물이 되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전장에 나간 군사가 어떤 이와 싸우는데 일대일의 싸움에서 이겼을 지라도, 전세가 기울고 있다면 그것은 이긴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한국 기독교의 전세는 기울었다.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도 많이 기울었다. 나 한 개인으로서, 한 명의 목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오늘 나에게 맡겨진 조그마한 싸움에 충실할 뿐이다. 맡겨진 사역과 성도, 그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전세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하나님이 장군이 되시어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신실하였다. 우리가 확신과 소망의 자랑을 굳게 잡는다면, 우리가 곧 그분의 집이다.(히3:6)
그 기다림은 "믿음"에 근거한다. 그간 하나님이 돌보시고 키우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셨던 신실하심에 신뢰하는 것이다. 그 돌보심에는 장자요 아들되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돌보셨다. 그 예수가 다시금 아들로 교회를 다스리시어 한국성도라는 "집"을 보수하시고 고치시고 이기게끔 하시는 그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그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어 전세가 역전될 때까지 웅크리어 기도하며 잠잠코 있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그 신실하심을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비가 육심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며, 시녀가 수없이 많지만, 나의 비둘기, 나의 순전한 자는 오직 하나뿐, 그 여자는 자기 어머니의 외동딸이요, 자기를 낳은 자의 귀한 딸이다. 여자들이 그 여자를 보고 복되다고 하며, 왕비와 후궁들도 그 여자를 칭찬하는구나.(아6:9)
예수는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다. 우리에 대해서 진지하시다. 때문에 그 신실하심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더 넓은 시야이다. 전세는 기울고, 내가 이기고 있어도 지고 있고, 패배가 앞에 보인다 하더라도 말이다. 더 넓은 시야로 보아야 한다.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 그 분을 바라보며, 그 예수를 바라보며, 오늘도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 신앙고백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여라...이는 우리가 처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으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히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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