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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_GH/칼럼_H

일상, 그러나 그 깊은 죄와의 싸움

by 우루사야 2021. 5. 27.

나는 뉴스를 보다보면 피하는 것들이 있는데 아동학대와 같이 "무력한 자가 고통받는 사건"에 대해서 피하는 편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 모두 그런 쪽 뉴스를 접하고나면 잔상이 너무 많이 남아 일상이 힘들다고들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연민과 사랑이 우리 가족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래서 어제 일이 잊혀지지 않아 오늘 글까지 쓰게 되는 것 같다. 

 

어제 아이들을 하원하러 가는 길에 고등학교 앞에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바로 경찰서로 함께 동행했다. 여차저차해서 인계하고 나는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 일이 계속, 아니 구타당한 아이의 모습과 주눅든 표정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다시 한번  정리해자. 맞는 모습보다 그 아이의 표정, 무기력한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오늘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예배당에 앉아 기도할 때도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중3 시절이 떠오르더니 나를 당혹케 했다. 그 때 일들이 너무 힘든 나머지 나는 그 시절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제 일을 통해서 투영되는 것. 아팠다. 힘들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해결해야 하는 나의 기억과 반응이다. 어찌보면 어제 내가 바로 경찰서로 가야했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들었던 것은, 혹여나 내가 너무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내 학창시절을 돌이켜볼때 어른들을 의지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나는 알았기에 그렇게 반응했던 것 같다. 그렇게 기도하며 나의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죄의 억압 속에서 모든 사람은 굴복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어른이 필요했던 것처럼, 인류에겐 신이 필요하다. 무기력한 그 모습을 하나님은 아파하신다. "어찌하면 내 머리가 물이 되고, 내 눈이 눈물의 샘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살육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밤낮으로 울 것이다".(렘9:1)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요 어른이 되어주신다. 이 세상에 굴복을 모두 없앨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해내는 단편적인 해결책보다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것이 어른의 해결책,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심성으로부터 해결해낸다. 그래서 억압받는 자의 환경이 변하지 않더라도 이기게끔 한다.  죄와 죄로 물든 환경을 이기는 자, 승리하는 자, 일어서는 자! 그것이 복음이 가진 능력이다. 

 

하나님이 택하고 구별한 자는 이런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죄를 이김으로써 더 확증하고 믿어냄으로, 더 다양해지고 강력해진 죄의 세상의 내일을 살아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실생활에서 살아내야 한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오늘의 영향에서 오는 감정으로부터, 내일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해석과 불안감으로부터 복음으로 살아내야 한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에워싸고 내 죄악들이 내게 덮쳤으므로, 내가 쳐다볼 수조차 없고 그 죄악들이 내 머리카락보다도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습니다."(시40:12)

 

그래서 복음은 또한 전생애적이다.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민수기 6장에서 나실인에 대한 규정은 포도를 먹는 것,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 시체에 대한 것 등 실생활에 관한 것들이 존재한다. 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고, 머리카락은 하나님의 권위를 의미하며, 시체는 죄에 대한 결과를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 나실인은 분명한 실생활에서의 자세가 필요했다. 고대에서 포도주는 물만큼 흔했고, 머리카락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면서도 내가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나와 상관없이도 내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나실인의 규정은 자신이 주의한다고 하여도 범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이 가득한 규정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포도의 일체를 멀리하라 하셨고, 시체에 대해서는 제사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셨다. 즉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까지 마련하시며 나실인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위험요소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죄와의 세력 안에서 우리에게 계속 시도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을 주신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여호와께서 나를 파멸의 웅덩이와 진흙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어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 주께서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신뢰할 것이다.(시40:1-3) 

 

세상의 죄를 없앨 순 없다. 그것은 온 세상에 편재하여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을 이기게 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나 주께서 나를 생각해주시니, 주님은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는 분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지체하지 마소서".(시40:17)

 

오히려 그것이 두려워하게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 안에 예수가 있음으로 인해서 "내가 율법이 되어 율법을 살아내는 자"가 된다고 말해준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니, 주님의 율법이 내 속 깊은 곳에 있습니다."(시40:8) 율법의 정수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 아닌가! 율법이 자신 안에 있는 자에게 사랑은 규율이 아니라 "그의 삶"이 된다. "복있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염려하는 자이니,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구해주신다."(시41:1) 자신의 주변과 환경이 염려되어 항상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가는 자, 그 자가 죄 아래서 억압받고 결국 어찌할 수 없이 무기력하게 죽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 복음은 우리가 율법이 되어 살아가게 하고, 주변인들을 사랑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지시키며 생명을 주시며 땅에서 복을 받게 하시고 원수의 탐욕에 넘겨주지 않으신다.(시41:2) 

 

율법의 완성이 되어 우리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으로 사는 자의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존귀하고 화평하며 온유하겠는가.  그 어떤 여유로움보다 평온한 삶이 그의 인생일 것이다. "아, 나의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구나...어여쁘기만 한 너, 내 사랑아. 네게는 아무 흠이 없구나"(아4:1a,7)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행복하길 원하신다. 죄의 억압속에서 나와 이미 승리하신 죄로부터의 속박을 이겨내 행복하길 원하신다. 태초로부터 시작한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누리길 원하신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너라. 내 동산으로 불어와 향기를 풍겨라. 내 사랑하는 이가 자기 동산에 들어가 맛 좋은 과일들을 먹게 하여라."(아4:16)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두 학생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이 죄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 영혼의 화평을 누리는, 율법이 되어 사랑으로 살아가는, 죄에서 승리한 자로 살아가길 말이다. 내가 그 두 학생 사이에 들어가 구타한 학생을 처벌시키고 맞은 학생을 치유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나는 그럴 권한도 힘도 정보도 없다. 오히려 오지랖일 수 있다. 그렇다. 현실적인 오지랖은 부리지 않겠다. 경찰도 말하길 학교에서 정리한다고 했으니 이제 그 일에서 손을 뗀다. 그러나 영혼의 오지랖은 계속해서 부리겠다. 왜냐하면 죄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 시간에 있고 그것은 과거의 나의 기억 속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죄와 싸우기 위해 기도한다. 승리를 선포한다. 나의 중3때 시간에서 나를 복음으로 위로하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셨음으로 나를 일으켜세운다. 그리고 그 복음의 능력이 어제 그 두 학생에게도 있게끔 중보기도를 한다. 할뿐이다가 아니다. 함으로써 이긴다. 아멘! 

 

그러므로 인애하심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자.(히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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