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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_GH/칼럼_H

이치를 따르는 신자

by 우루사야 2021. 4. 7.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세상 이치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부재한 현대한국은 갈등의 장이 되고 있다. 남녀 역할의 차이와 성정체성의 혼란은 결국 기준과 잣대를 무너뜨려 버렸고, 그것은 가정의 파괴, 자아의 파괴, 사회의 파괴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러면서 다시금 대두되는 것이 "기준"에 관한 것이다. 남자가 남자답게, 여자가 여자답게, 가정과 사회가 걸맞게 세워지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기에 생각하고 고민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과연 나다운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할 때 결국은 신적권위에 대해서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와 신자에게 신적권위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이루는 과정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제각기 쓸데없는 변쟁만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교회는 무엇때문에 있는 것인가? 사회운동과 이웃사랑인가? 신학정립? 큰 무리를 통한 공동체? 재림을 앞당기는 것?

이것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것을 논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리화할 것이고 이 시도들을 사명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며 실재적이며 현실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시작과 끝을 분명히 알고 그 태초로부터 시작한 신적 작정이 미래에 이뤄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해서 교회는 가장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딤전1:3)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7)

교회와 목회자는 확신하는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미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확신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되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싸우라 말한다. 믿음에서 탈선한 자들을 향해서 확신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실행시키되 착한 양심, 즉 하나님의 사람다운 싸움의 방법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18-20)

세상이치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의 원리와 기준에 대한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경륜이 이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와 신자가 살아갈 삶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한 싸움이다. 믿음과 양심에서 이뤄지는 이 싸움을 오늘의 삶을 통해서 살아가는 교회가 진정한 믿음을 가진 교회이다. 이 교회의 모습은 레위기에서도 나타난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속죄일에 대한 설명은 레위기 16장에 등장한다.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레16:2)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는 속죄일을 지켜야 했다. 일년에 한번 지켜지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예표하는 기준이 있었다.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매번 올 필요가 없었다. 속죄일을 통해서 그들의 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년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삶은 평소에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한다. 이것은 아론에게도 마찬가지다.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레16:3-4)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선한 양심을 요구되는 이유는 그 분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의 기준 앞에서 인간은 순종하게 되고, 그 순종 안에 믿음과 선한 마음이 요구된다. 아굴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30:5-9)

다윗은 어떠했는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위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2-14)

그런데 이 두사람이 공통적으로 겸손해지는 부분이 있다. 바로 자연만물을 바라보면서 일반계시를 깨닫는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19:1-6)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멋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잠30:24-28)

하나님의 경륜과 그가 베풀어두신 자연만물, 그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 그 이치이다. 그 경륜을 자연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요 그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고 이것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복음의 확장이 그 인생의 최고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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