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순서라면 모세와 성막설계에 대해 논의를 마치고 모세가 성막을 만들면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정 가운데 한 가지를 더 넣어놓으셨지요. 그 성막에 누가 오게 할 것인가? 바로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죄가 그대로 드러나버리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자들. 그들이 성막으로 오게끔 하고자 하나님은 성막을 바로 만들지 않는 상황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죠. 그래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가지 못하도록 잡아두고 계셨고, 그렇게 리더가 부재한 이스라엘은 불안과 초조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다 못해 아론을 압박하여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자신의 지식을 총 동원해 만들어 "금과 송아지"라는 당대에 가장 좋은 형상 두가지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이 영적간음이라고 부르시며 이 백성이 죄인됨을 드러내셨죠.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 당장 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7절입니다.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임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이 땅에 임하십니다. 모세는 텐트 하나를 지정하여 이스라엘 진 밖에 설치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은 어떻게든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길을 찾아내시고 또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것이 연합되어 선을 이루게끔 하나님은 일하시며, 시험을 피하고 이겨낼만한 힘과 길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준비할 시간, 하나님을 온전히 맞이해야 할 준비를 말이죠. 금송아지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아무리 여호와의 날을 정하고 춤추고 음식을 나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임하시지만 거리를 두시며 진 밖에서부터 천천히 가까워지고자 하십니다. 10절 이어봅닙다.
9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세가 이 회막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증거로 구름기둥이 그 회막 위에 서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들 가까이에 계심을 확인하게 되지요. 네, 여러분. 금송아지는 이스라엘의 불안과 초조함을 드러낸 말 그대로 영적간음을 위한 감정의 쓰레기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회막에는 무엇이 떠있습니까? 이스라엘을 그간 이끌어 온 구름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생뚱맞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오신 일들을 기억하며 그 연속성에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어떻게 계시는지 확신하는 것이죠.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광경을 보고 확인하여 제어미임을 깨닫는 자는 없습니다. 자라나면서 오랫동안의 어머니로부터의 감정과 생각, 행동의 교류를 통해, 그리고 닮아가는 어머니와의 모습을 연속적신 시간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도 우리는 그렇게 알아가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애초에 거룩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면서 회심하게 되고, 그 회심 이후에 점점 성화되어져 가면서 점점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나의 인생 종말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심을 점점 알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태초부터 하신 일들을 소개하는 성경을 믿어가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금송아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출애굽한지 몇년 되지 않았던 시간이었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은 또 다른 틈새, 훈련의 시간, 바로 광야 40년을 허락하셨던 것이죠. 그렇게 모세가 텐트로 들어갑니다. 11절입니다.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그 회막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관계를 맺어갑니다. 마치 친구를 사귀듯이 말이죠. 사실 이스라엘 전체가 그랬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신을 섬기느라, 변종된 예수를 만들어 섬기느라, 진짜 내 안에 오신 예수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마치 8, 10절처럼 말이죠.
8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10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본래 성막 제단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제사를 드리며 예배하고, 또 제사장들은 성막 안으로 들어가고, 대제사장 아론이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장막에 서서 모세만 바라봅니다. 나중에 성막에서 성전으로 바뀌어 건축될 때에 가장 바깥쪽에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 밖에서 있을 수 있도록 한 공간이었습니다. 마치 지금 이스라엘이 그래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그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보혈의 피를 믿지 못한다면 그 성령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의 뜰에 있는 이방인처럼, 은혜를 받는 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어 나에게 주신 성자의 피와 대속을 기억하며,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교제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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