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홍해를 건너서 자유인으로써 첫발걸음을 뗍니다.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보다는 전쟁이 없는 광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었죠. 그런데 광야길은 단지 전쟁을 피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전쟁은 치뤄야 하는 일이기에,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을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장자나라로써 "다스리는 전쟁"을 할 수 있게끔, 그래서 그에 어울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는 전쟁을 하는 장자나라"로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광야길에서 훈련받게 하고자 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첫발걸음부터 훈련을 시키십니다. 22-24절입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3일길을 걸어도 쉴만한 곳을 찾지를 못합니다.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물도 있어야 하고 편안한게 잠자고 먹을만한 텐트칠 만한 곳이 필요했습니다. 말 그대로 길바닥 생활 3일만에 한계가 온 것이죠. 아직 이스라엘은 작심삼일 정도 밖에는 안되는, 말 그대로 장자나라가 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이런 환경으로 보내셨습니다. 한계에 다다르도록, 인간의 힘으로 얼마나 살 수 없는지 알려주셨습니다.
특히나 원망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경로를 결정짓는 것은 구름불기둥과 모세이기때문이죠. 네, 말 그대로 하나님을 따라, 모세를 따라 나서는 족족이 쉴만한 곳곳이 안나오니 원망이 나오겠지요. 게다가 겨우겨우 다다른 곳 마라라는 곳입니다. 물이 있는 곳이었어요. 문제는 물이 상한 것인지 먹을 수가 없는,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는 쓸데없는 오아시스였던 겁니다. 그리니 더 원망이 빗발치기 시작합니다. 허탕치는 하나님의 인도, 허울만 좋은 하나님의 인도라는 생각에 이들은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원망이 전에도 있었죠. 바로 홍해 앞에서의 원망이었습니다. 뒤에 바로가 쫓아오는 마당에 홍해 앞으로 인도하니 죽을 운명이라 생각되어 원망했었죠. 그들의 심령 안에는 하나님이 홍해보다도 적고, 3일 갈증보다도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한계점 속에서 하나님이 훈련시키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25절부터입니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하나님께서 먹을 수 없을만큼 상한 물에 나무를 집어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 물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기에서, 지금 이 현장에서 하나님은 무언가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25b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설정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땅의 것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직분자로써, 장자나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땅의 것이 없어도 불평불만하기보다,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도, 율례, 말, 계명, 의, 규례를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어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희안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줄 것이다라는 말로 끝내셔도 충분한 교훈과 메시지, 훈련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애굽사람에게 내린 질병과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겠죠. 특히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즉 10가지 재앙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섬뜩합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즉 하나님의 것이 되지 않으려 할때, 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이스라엘도 "10가지 재앙의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박을 피했다면, 순종하지 않았던 이들은 우박에 맞아 죽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런 점에서 쓴 마라물은 피가 되어버려 먹을 수 없었던 첫번째 재앙을 닮습니다.
여러분. 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이스라엘입니다. 혈통만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결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내 생활에 반영하지 않고 오로지 욕망과 욕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요 교회의 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 마라물이 쓸 때 하나님이 지정하신 나무로 달게 되었던 것처럼, 그 마라물처럼 쓰디 쓴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지정하신 나무가 들어올 때에 우리 인생은 달게 됩니다. 누구의 나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은혜인 독생자의 대속. 그것이 우리 인생에 들어올 때 우리는 달고 단 인생이 되지요. 그 결과가 27절에 있습니다.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굳이 12개의 샘물과 70그루의 나무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200만명이 텐트를 치고 쉴만한 곳이었습니다. 네, 영원한 안식의 표본을 하나님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따라올 때에 인간은 행복하다는 공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 첫발걸음에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복음의 원리"를 가르쳐주셨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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