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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_F/출애굽기

출 5:1-14

by 우루사야 2024. 9. 11.

모세는 하나님의 것이 되어서 이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 즉 능력있는 분이 약속한 것을 지킴을 믿으며 모세는 나아가게 됩니다. 왕궁에서 광야로 옮겨와,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가지고 나아가는 그였습니다. 드디어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바로를 만나게 됩니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같습니다. 나약하디 나약한 살인도주자요 광야 나그네 모세와 초강대국의 왕 바로의 만남입니다. 

1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2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3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성경은 이 대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 하나를 언급합니다. 모세는 1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말합니다. 바로는 무어라 답합니까? 2절에 보니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겠냐고 대답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절에서 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자신이 보고 목격하고 경험한 하나님을 말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이런 큰 간격을 보이게 합니다.

4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5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6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7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8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9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그리고 여기서 이제 힘 대 힘의 대결로 나아가게 됩니다. 네, 세상이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런 구도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9절에 보니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는 조치를 바로는 내리게 됩니다. 바로의 입장에서 모세의 제안은 들어줄 수 없는 것을 떠나 오히려 자신을 해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죠. 여러분, 복음은 결코 부드럽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회개"를 일으키게 만듭니다. 우리를 찌릅니다. 우리를 깨부숩니다.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자는 세상에 나가 세상으로부터 깨지고 부서지죠. 어디를 가든 우리는 부서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부서짐은 새사람으로의 탄생입니다. 세상에서의 부서짐은 주저앉음입니다.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깨지고, 외로이 홀로남는 말로를 걷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나아가 옛사람을 부수고 새사람으로 나오는 이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나아감으로써 새사람, 새나라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땅의 논리와 순리로는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 세상은 이 길을 막기까지 합니다. 자신과 다른 원리로 세상이 운영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죠. 오로지 힘의 논리로만 흘러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네, 죄와 사탄의 논리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를 유혹하고자 합니다. 5절을 보면 바로의 논리가 보입니다.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바로의 논리 속에는 오로지 숫자밖에 없습니다. 8절에서 보면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하라고 말합니다. 작업환경은 더 어렵게 만들어놓고서 이 숫자라는 틀에 이스라엘을 가두고자 하는, 더 일을 열심히 시킴으로써 딴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힘의 논리로 억누르는 것이죠.

이 논리는 현대에 가장 많이 팽배하게 퍼져있는 것입니다. 빚을 냄으로써 직장생활을 이어가게 만듭니다. 돈이 돈을 벌게끔 만들어야 선순환이라고 말합니다. 일해서 버는 돈보다 빚을 내서 투자를 함으로써 더 큰 수익을 내는 레버리지가 가장 많이 대두된 투자방식입니다. 숫자는 우리의 도구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행태는 숫자에게 우리를 묶으라고, 우리가 숫자 안에서 갇혀 살겠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새사람 새나라에 걸맞는 사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원리를 가지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고난"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10절부터 보면 히브리족에게 고난이 주어집니다. 네, 하나님의 장자나라, 이스라엘이 되기 위한 길은 이렇게 고난으로 이어집니다.  

10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이 나가서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로가 이렇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11너희는 짚을 찾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그러나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2백성이 애굽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니13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14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어떤 이유도 필요치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영적원리를 처음부터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힘의 논리와 돈의 원리가 최고여야 하기때문이죠. 그래서 다른 원리는,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리를 핍박합니다. 다윗은 아무런 이유없이 사울에게 핍박받았습니다. 예수님 또한 재판과정 내내 아무 변론도 하지 않으셨음에도 온갖 고문과 모욕을 당하셨죠.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낮아지면 높아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낮아지면서 언제끝날지 모르는 그 낮아지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때론 이 앉아짐이 너무 부당하고 이해되지 않으며 하염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길을 걷는 이유는 하나님의 전능하심뿐만 아니라 그 전능한 분이 약속하신 것을 지키실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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