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해 광야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며 훈련을 받아왔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새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시간이 필요합니다. 쉽게 말해 물든 것을 빼는 시간이 필요하죠. 특히 "누가 왕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물을 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과 신음의 소리를 들으시면서도 이 시간을 허락하셨던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는 그 고통의 시간이 더 심화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모세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네, 지금 이 시간은 모세가 새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이스라엘이 새 나라가 되는 과정을 함께 겪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15절부터 보시죠.
15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16당신의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이스라엘이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특권을 누리던 계층이 있었는데 15절에서 등장하는 기록원들입니다. 애굽관리들로부터 할당량을 부여받아 그것을 이스라엘 노예들을 통해서 실현시키도록 독려하던 자들이었죠.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힘의 논리로 운영되는 계급사회에서는 이런 중간다리역할을 하는 특권층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대 때 이스라엘에게는 세리들이 그러했고, 우리나라 농경사회에서는 농민들을 쥐고 있었던 지주의 하수인 마름이 그 역할을 했죠. 이렇게 힘의 논리로 운영되는 사회에서 이 중간계층은 갑이자 을의 역할을 함께 수행해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록원들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이 중간계층은 어떤 삶을 대부분 살아왔을까요? 더 상위계층으로부터 신망을 얻어 살아가는 기생충과 같이 살던지, 아니면 하층민들의 권익을 위해서 자주적으로 살아가던지 했지요. 그런 점에서 대부분은 아마 전자와 같이, 상류층에 빌붙어 기생충과 같이 살아왔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기록원들이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들도 바로에게 항변하며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반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바로의 대답을 보시죠.
17바로가 이르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도다18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너희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
큰 벽 앞에 서있는 기분입니다. 힘의 논리에서 상급자의 이러한 평가는 하급자로 하여금 아무대꾸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논리와 인격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상류층과 상급자의 평가와 명령하달만 있기 때문이죠. 바로는 여호와의 명령을 전달한 모세의 메시지를 "일하지 않으려 괜히 부리는 수작"정도로 치부했던 것입니다. 특히 고대에서 각 민족의 신들이 있는 상황에서 바로의 이러한 처우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었습니다. 신으로 치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 자체를 하대하기까지 하는 것이었죠. 애굽의 신이 이스라엘의 신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를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항상 마주했던 것이 "폭력과 탄압"이었습니다. 항상 힘의 논리가 그의 사역을 가로막았습니다. "23b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고전11) 히브리서는 더욱 비참한 믿는 자들의 현실을 말해줍니다. "36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11)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사실이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우리가 돌아보길 소망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고 억지로 수난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생활이 힘의 논리와 어울려져있는지, 아니면 힘의 논리에 자꾸 부딪히는지를 살펴보시라는 말입니다. 힘의 논리는 높아지라고 말하고 가지라고 말하고 누리라고 말합니다. 과연 여려분은 그것에 대항할 힘이 있으신지, 그리고 그 대항할 힘이 있다면 그 힘의 근원이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것인지 우리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힘의 논리에 굴복당한 기록원들은 결국 비난의 화살을 모세에게 돌리고야 맙니다. 19절부터 입니다.
19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20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21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22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3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모세 입장에서 사면초가 상태입니다. 애굽왕실에서 나와 물리적인 광야에서 하나님을 독대했다면, 이번에는 내면적인 광야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와 적대적인 관계인 것만해도 힘든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내부가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항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하나님은 모세를 훈련시켜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모세가 의지할 만한 것이 없게끔 만들어가십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게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며, 뱀으로 변한 지팡이, 나병이 들었던 손, 피로 물들었던 땅.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끔 하나님은 모세 주변에 의지할 것이 없게끔 만들어가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대항하고, 내 사고와 생각이 힘의 논리로 물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신 하나님께 더 집중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가까운 나로써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