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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누가복음_하나님의 아들

눅 18:1-8

by 우루사야 2024. 4. 15.

오늘 본문에서 주제는 명확합니다. 누가는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1절입니다.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이유에 대해서 무어라 하십니까?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낙심. 떨어질 낙, 마음 심. 마음이 떨어지는 것, 마음을 놓는 것, 마음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성경에서도 give up 포기하는 것이라고 번역합니다. 네,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며 한가지 비유를 소개해주고 계십니다. 2-3절입니다.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고대 이스라엘에서 재판관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 여겨졌습니다. 지금 우리 사법체계에서의 권한과 위상보다 훨씬 더 높죠. 그런 점에서 재판관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로써 선하고 의로와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 재판장은 자기자신을 판단할 때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로 여기고 있는 불의한 재판장이었던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한 과부가 와서 원수의 처벌을 요청을 합니다. 과부가 누구입니까? 고대사회에서 가장 하층민, 아무런 사회적 지위와 능력이 없던 것이 여성 중 과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고아와 과부를 묶어서 대하고 있는 표현들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무런 힘이 없듯이 과부도 그러하다는 것이죠. 그런 과부가 와서 원수에 대한 정의로운 사법처리를 요구할 때, 불의한 재판장은 들어줄 일이 없지요. 고대 재판장은 지금보다도 더 지역사회와 밀접하게 유착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때문에 불의한 재판장이 중립적으로 과부의 청을 들어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상황에 한가지 변수를 두십니다. 5-6절입니다.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불의한 재판장이 말하는 것을 좀 들어보라고 하십니다. 이 과부가 지역유지와 친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불의한 재판장에게 연줄을 댈 상황도 못되는 하층민 비주류 소수층이었습니다. 그러니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매일같이 재판장에게 찾아와 간청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한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지구 반대편 2000년 예수님도 동일하게 아셨는지 이런 비유를 드시나 봅니다. 이 여인이 계속 괴롭게 찾아온다면, 지역 평판도 더 안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재판장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원한을 풀어주리라" 재판장은 더 괴로와지지 않으려고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겁니다. 여기서 극적으로 예수님은 한가지 접속사 "하물며 하나님께서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이런 불의한 사람도 이렇게 원한을 풀어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오죽하시겠냐는 겁니다. 7-8절입니다.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재판장에게 과부는 아무런 영향을 못미치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임을 예수님이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어 선택하신 양자로 자녀로 삼을 우리의 간청을 왜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도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잠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처럼 여기면 들어줄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이심을 예수님은 밝히셨습니다. 그럼에도 당장에 응답을 주시지 않으시는 이유는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응답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까지 기다리라는 메시지, "신뢰의 관계에서만 줄 수 있는 메시지"를 우리는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과거에는 핸드폰이 없었습니다. 약속을 했으면 그 시간까지 그 사람이 올 것을 신뢰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되시는 분을 우리가 신뢰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의 생애를 인도해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인생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신뢰의 관계로 우리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고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우리, 명예로운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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