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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누가복음_하나님의 아들

눅 10:25-37

by 우루사야 2024. 3. 1.

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자도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의 제자는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들은 자격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귀신을 내쫓고 질병을 고칩니다. 악한 것들을 제어할 권능을 가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닮은 자녀가 되어갑니다. 그런데 더 중요하게 닮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권위와 능력만 닮을 것이 아니라 본성을 닮아야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죠. 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본성, 사랑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먼저 25-29절입니다.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다가오지만 의도가 불순했습니다. 그리고서 꺼내는 주제는 영생, 즉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될 자들의 자격요건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간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겸손하게 진중한 믿음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권위와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율법교사의 질문은 "무엇을 하여야"라고 전제를 시작합니다. 질문부터가 잘못되었죠. 예수님은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율법교사의 입장에서 하나하나 고쳐가기로 하시며 답해주십니다. 영생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냐고 물으니 예수님이 율법에 어떻게 되어 있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니, 예수님은 맞다! 그럼 그것을 행동에 옮겨라! 라고 말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입장에서 조금씩 깨닫게 하시려고 이 대답을 하신 겁니다. 율법을 행한다고 영생을 얻을 수 없거니와, 인간은 율법을 온전하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우리의 죄를 드러내주는 영혼의 거울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그 거울을 잘 보고 있으면 자신의 더러워진 얼굴이 씻겨진다는 식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은 "그래, 그럼 해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그런데 29절에서 이 율법교사가 두번째로 의도된 질문을 합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한 질문"으로써 말이죠.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무슨 말입니까? 나는 하나님은 사랑했거니와 내 이웃도 모두 다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영생을 확인받아야겠습니다 정도로 들립니다. 굉장히 오만한 사람이죠. 이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그의 관점이 틀렸음을 말하고자 하십니다.
36-37절을 먼저 보시죠.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교사는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사랑할 대상을 선긋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지금까지 충분히 사랑하며 살아왔다고 자신하며 영생의 확답을 얻을 수 있다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너의 인생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앞에 둔 인생에 내가 들어준 이야기와 같이 불의의 사고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느냐? 너는 그를 과연 사랑할 자신이 벌써부터 있다는 말이냐? 우리가 할 일은, 내 인생길에서 곁에 등장하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그 때 그 때마다 돌보며 사랑하는 것이다. 영생은 얻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비를 베풀며 사랑하며 살아가다보면서 "아, 내가 영생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할 힘이 있는 것이구나"라며 깨닫는 것이다."라는 관점으로 해설해주고자 하신 것이죠.

특히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특히 예시로 드신 이유는 지금 질문을 하는 율법교사를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죠. 반대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 이유는 율법교사가 이웃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네, 예수님 입장에서 율법교사는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자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이 멋대로 만든 종교적 의무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자들이었을 뿐입니다. 그 공로를 조금씩 마일리지처럼 쌓아 천국에 가겠다고 멋대로 구원의 체계를 만들어놓고 나는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자위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내 곁을 돌아보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또 하나의 사랑의 대상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영생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그 영생을 하나하나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은 그 영생을 찾지 못하게 합니다. 율법교사는 과연 그 영생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그 이면에는 불안과 초조, 죄인으로써 능력없는 자신의 처지 속에서 풍성해보이는 예수의 제자들과 비교하며 어찌보면 자신의 갈급함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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