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강해설교/누가복음_하나님의 아들

눅 9:57-62

by 우루사야 2024. 2. 28.

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들을 계속해서 모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에 맞춰서 하나님 나라의 전령이 되어줄 추수할 일꾼, 즉 제자들이 생겨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있는 천군천사를 복음의 전령으로 쓰지 않으셨습니다. 사림이 사람을 낚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구하러 오신 것처럼, 천국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될 자들은 누군가를 향해 낮아지어 복음을 전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제 잠깐 살펴본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과연 누가 제자인가"라는 질문에 말씀을 통해서 답해보고자 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예수님은 3명의 제자들에게 광장히 적나라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가족의 장례나 작별인사까지도 허용하지 않으시는듯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평생 독신으로 살아갈 카톨릭의 신부나 수녀, 깊은 산 속에 있는 사찰로 가는 스님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방향은 예수님과는 무언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저 천상에서 이 땅으로 오셨고, 제자들에게 권위와 능력을 위임하시면서까지 마을 곳곳으로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면 더 가라고 하실 분이지, 세상과 등지라고 하실 분은 아니시기 때문이죠. 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우선순위를 지킴으로써 빛의 역할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세상은 결코 할 수 없는 우선순위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이죠. 먼저 57-58절을 보시죠. 

57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먼저 사마리아인들로부터 거절당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고향사람들에게 죽을 고비까지 넘기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거절하기 마련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빛된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이 어찌보면 이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거절의 여파는 신자로 하여금 어떤 처지가지 몰고가게 될까요? 예수님은 제자로 따르겠다는 이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나는 머리 하나 눕힐 침대도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집이 없으셨을까요? 나사렛에 부모님 집도 있었고, 독립하신 후에는 가버나움에 근거지를 마련하시기까지 하셨죠. 

이 말씀은 신자의 고단함에 대해서 표현하고자 하심입니다.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손해봐야 하고, 아직까지는 어둠이 득세하고 있는 실정에서 빛된 신자는 공격받을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57절에 보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리이다"라고 제자가 말했습니다. "어디"라고 속해 있는 곳들에 핍박받고 손해보고 어려움에 처할 수 밖에 없어도 과연 따를 수 있는가라고 예수님은 물으셨던 것이죠. 이처럼 지금 예수님의 제자도는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표현방식에 맞춰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59-6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모으시다보니 여러가지 케이스가 생겼나 봅니다. 누가는 두번째 케이스를 소개합니다. 이번에 보니 59절 상반절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먼저 제안하신 경우였습니다. 이 제자가 먼저 청한 것이 아니었죠. 뒷 이야기를 보니 이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병을 앓고 계신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르심에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추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경우 장례를 치르고 오게 하옵소서."라는 청이었습니다. 너무나 마땅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 뚱딴지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거절하신 것 같습니다. 

이 말씀도 첫번째와 같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는 가족의 장례도 반대하는 자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예스 or 노라고 말씀하시 않으시고, 죽은 자와 하나님나라로 대답하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사랑과 도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결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본분보다 앞설 수 없다는 우선순위를 말씀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특히 장례를 앞둔 이에게 예수님은 장례가 곧 있을 것 같은 이를 제자로 부르심으로써 무엇이 우선인지에 대해서 말씀해주고자 하셨던 것이죠. 이럴 때 우린 고민이 됩니다. 주일성수와 주일에 생기는 경조사 앞에서 말이죠. 또는 헌금과 생활비 앞에서 말이죠. 단순히 주일에 예배를 드렸다거나 헌금을 한 것으로 모든 신앙의 요소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는 반대로 주일성수를 어기거나 내가 작정한 헌금을 축소하였다고 해서 지금 당장 어떤 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나 자신 밖에는 점검할 수 없는 내 신앙양심에 대해 나는 어떤 기준과 우선순위를 가지는가"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위한 일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을 대조시킴으로써,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일과 생명이 전파되는 일을 대조시키시며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끔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비의 장례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대해서 중요도를 가지라는 것이겠지요. 마지막으로 61-62절입니다.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마지막으로 세번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단서가 붙는 사람이네요. 가족과의 작별인사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농사일을 비유로 드십니다. 일을 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말이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전파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지금 할일이 너무나 많고, 그 일은 살아 움직여 퍼져가고 있으며, 그 때문에 다른 것에 한눈 팔 새가 없을 정도라고 말이죠.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라면, 결코 다른 것과 함께 고려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죠. 


'강해설교 > 누가복음_하나님의 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눅 10:25-37  (0) 2024.03.01
눅 10:17-24  (0) 2024.03.01
눅 10:1-16  (0) 2024.02.28
눅9:51-62  (0) 2024.02.27
눅 9:46-50*  (0) 2024.02.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