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가장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바로 변화산 사건이었습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시죠. 28절로부터 31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28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29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30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31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누가는 '예수님이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말씀을 하신 후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소개해줍니다. 네, 변화산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왜 보여주시는지 이해하려면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설교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누가의 힌트인 것이죠. 예수님이 이번에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십니다. 드러내지 않고자 하심이죠. 그럼 그곳에서 예수님은 어떤 것을 가르치고자 하십니까? 29절에 보니까 첫번째, 겉모습이 변하셨습니다. 30절에서 두번째, 예수님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예수가 그 자리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예고까지 주십니다.
이런 방식의 제자교육은 이해하기가 참 힘듭니다. 우리는 교육생이 알기 좀 더 쉽고, 듣기 편하고, 동의되기 좋게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릅니다. 옛인생 옛습관을 버리는 자기부인. 그리고 죽을 각오로 따라오라는 의미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각오로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무서워서 따르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은 자기 길에 얼마나 확신이 있으면, 따라오려면 확실하게 각오하고 뒤에 옛인생 미련 버리고 오라고 할까?'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 확신은 변화산에서 놀라운 모습으로 인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적영광으로 후광이 비취는 존재가 되는 예수의 모습, 게다가 이스라엘 민족역사에서 가장 권위자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을 세운 모세와 대선지자 엘리야가 예수 곁에서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 후에 35절에서 성부 하나님이 "35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까지 하십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뜻이며, 이 뜻을 붙잡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근거는 차고 넘칠 정도입니다. 변하는 용모를 통해 눈에 보이는 권위, 모세가 등장함으로써 민족역사로서의 권위,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남으로써 종교적 권위, 하나님의 음성을 통한 신적권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가 왜 하나님의 뜻이며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가 나타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이것을 모든 사람이 있는 곳에서 아니면 12제자가 있는 곳에서 드러내지 않으시고, 3명에게만 보이셨을까요? 32-36절입니다.
32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33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4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36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예수를 뒤따랐던 제자들이 잠결에 또는 어떨결에 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는지 베드로가 마치 이 곳이 천국인 것처럼 느껴졌는지 여기서 머무르고 싶다는 의견까지 제시하지만, 자신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구름이 그들을 덮으려고 하니 두려워하는 기색까지 역력합니다. 네. 지금 이 광경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신비한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고가 있었습니다.(마17:9) 이 이유 또한 어제와 동일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아니라 변화산에서의 예수로 기억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수난받을 것과 죽을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부활승리와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신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하실 것"이라는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고통과 고난, 역경, 고뇌 가운데 위로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또 내 안에 계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 묵상, 예배의 순간들을 통해서 은혜롭고 장엄하며 위엄이 느끼고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예수가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걷고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가 도착하신 하나님 곁에 우리도 함께 있을 것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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