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세례요한의 사역이 계속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추한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하나님은 구약에서 많은 언약들을 주셨고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셨으며 마침내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400년간 계시가 끊어졌던 이들에게 세례요한은 메마른 땅에 단비와 같은 하나님의 통로였습니다. 그의 사역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의 증거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반응에 대해서 오늘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많은 백성들의 민심은 어땠을까요? 15-17절입니다.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5절에 보니 백성들도 메시야를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이상향, 자신들이 되고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추종하고 싶을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대리만족을 할 수 있도록, 대단한 사람이 메시야로 오기를 이스라엘은 바랬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꼭 알맞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종교지도자들과 다르게 세례요한은 빈들에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은 참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며 그에게 몰려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 구원자가 세례요한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단번에 그 의견을 "부정"합니다. 세례요한은 오히려 앞으로 오실 구원자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 인물", 너무나 위대해서 그 사람의 신발끈 조차도 만질 수 없을 정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물을 통해 회개를 전하지만, 그 분은 "신"이기때문에 능력과 불로 세례를 베풀어 회개케 하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누가 진짜 알곡신앙인지, 가짜 쭉정이 신앙인지 분별하고 심판까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성령"과 하나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우리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회개하는 이유는 방향설정입니다. 방향을 올바르게 잡았다면 앞으로 나아가야죠. 그 힘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방향으로 이렇게 나아가자고, 나처럼 살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죠. 세례요한이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의 방향은 "회개에서 더 나아가 능력과 불로 역사하시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네, 알곡은 없는 쭉정이, 실속이 없고, 알곡이 없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실제가 있고 실존이 있는, 실생활에서 드러나는 삶으로 예수님은 인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질적 차원 자체가 비교가 불가하다고 말한 것이죠. 본문 계속 보시죠. 18-20절입니다.
18또 그 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19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19절에 보니 헤롯왕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대왕의 둘째아들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이복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그러니 유대사회에서는 왕의 이런 행실은 참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권력자이기에 함부로 말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요한은 그런 권력자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선지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면서도, 눈 앞에 있는 권력자를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준비하는 자의 인생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봅니다. 세례요한조차도 바랬던 예수의 영을 품고 사는 인생, 그것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런지 돌아보는 이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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