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전에 왔던 아기 예수입니다. 신이면서도 인간의 한계와 조건 안으로 들어온 예수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자도 사회적 지위가 낮은 목동들과 노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른 사회적으로 낮은 자리에 있는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과부 안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사회뿐만 아니라 옛날 우리나라도 남자중심사회에서 결혼을 했음에도 남편을 잃은 과부는 어디 의지할데가 없이 극빈층으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그런 과부에게 아기 예수가 나타났고 그녀는 메시야의 나타남을 찬양하고 증거하게 됩니다. 누가는 계속해서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를 서두부터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인간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36절을 보시죠.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시므온을 설명할 때와는 다르게 안나는 아셀지파, 비누엘의 딸, 선지자, 나이가 많았고, 과부가 된지 수십년이 되었다고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외부적인 조건은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누가는 이 여인에 대해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말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방법과 과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 구절을 통해 이 여인은 과부로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평생을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말이죠.
여러분, 아무리 암흑의 시대라고 해도 하나님은 항상 기도의 용사,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남겨두시기 마련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원리 중 하나가 남은자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무를 잘라 불태우시더라도 그루터기는 남겨놓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신비로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고 생명이 시작되게끔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원리로 대표적으로 바벨론 포로귀환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원리는 곳곳에서 적용되지요. 이스라엘이 모두 애굽의 노예일 때 하나님은 모세를 남겨놓으셔서 출애굽으로 인도케 하셨고, 가장 극악무도했던 아합왕과 이세벨 아래에서 숨겨진 100명의 선지자들이 굴 속에서 피해 살아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는 지금 한국기독교 안에도 마찬가지로 역사되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수적으로나 사회적 영향력으로나 위축되다 못해 쪼그라들고 있습니다. 교인들 조차도 성경과 영적원리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을 어려워하거나 의미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신자를, 빛으로 살고자 하는 자를, 소금으로 세상에 대항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자를 남겨놓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안나처럼 말이죠. 남편을 잃고 사회적 지위를 다 잃어 빈곤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음에도, 성전에 머물면서 섬기는 자들을 하나님은 남겨놓으십니다. 400년 동안 계시가 끊어졌다고 말할 정도로 암흑의 시대에서 노인 시므온과 안나는 아기예수를 바라보며 새시대가 도래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38-39절입니다.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9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하나님은 마침 이 때에 안나와 아기예수를 만나게 하셨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그녀는 아기 예수를 단번에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기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해줍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이라고 누가는 말합니다. 지난 번에 살펴봤듯이 속량은 누군가의 잘못의 댓가를 지불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했음을,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아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회개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었죠. 그들에게 안나는 아기예수의 나타남, 즉 속량을 완수해 줄 신이자 인간,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음을 증거했던 겁니다. "그에 대하여" 아기 예수의 의미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아기 예수의 몸에 글자가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신비하게 그녀의 눈 앞에서 천사가 어떤 것을 말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간 신앙의 선배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해오신 뜻과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신앙과 성전을 지켜온 그녀였기에 아기예수를 보고 해석할 줄 알았던 것이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기예수에게 목동들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낮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경건한 삶을 통해서 예수의 다시오심으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안나는 평생 의지할 곳이 없었지만 아기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 어느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있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예수의 영,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할 예수, 우리가 맞이할 예수, 우리가 바라볼 예수가 누구인지 나 자신에게 물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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