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의 탄생이야기를 지나 신생아 때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를 누가는 왜 하는 것일까요? 마태나 요한과 같은 12제자로써 예수님과 가깝게 지냈던 이들도 모르는 사실을 누가만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기보다는 다른 저자들은 다른 관점에서 예수를 말하기 위해서 생략했던 이야기를, 누가는 자신의 주제에 맞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등장시키는 입니다. 그럼 누가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입니까? 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즉 인간이신 예수입니다. 왕으로 바라본 마태, 좋은 소식으로 본 마가, 로고스라는 우주의 원리이자 진리로 본 요한과 또 다르게 누가는 예수님을 참인간의 관점에서 보고 싶었기에 신생아 때의 이야기도 추가하고 있는 것이죠. 21-22절을 보시죠.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세례요한 때처럼 예수도 율법조항에 따라 8일 안에 할례를 받게 됩니다. 이름 또한 가브리엘이 전해준 예수라는 이름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의 법, 즉 하나님이 제정해주신 율법,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질 때 주어진 초대헌법을 따라서 아기예수는 예식을 치르러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해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이 땅에서의 순리, 원리, 절차, 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고 상상하기 마련이죠. 슈퍼맨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도깨비 방망이는 원하는 모든 것을 뚝딱하고 방망이로 꺼내게 되며, 산신령은 나무도끼도 금도끼로 바꾸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자입니다. 그것이 신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 신이란 당신이 만든 순리와 원리 안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최고의 지혜와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는 자라고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율법 안으로 아기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 아기 예수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국적, 부모, 외형, 성별 그 어느 것 하나 선택하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꼭같게 운명을 타고난 인생으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는 그 율법 안에서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내십니까? '율법을 온전히 완성한 자'로 사셨다고 말해줍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 참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참인간다운 환경에서 사십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신의 면모를 보이십니다. 인간은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지만, 예수는 실수하지 않으시고 잘못을 범하지 않는 완벽한 삶을 살아내신다는 겁니다. 지금 아기의 모습으로써 요셉과 마리아의 수고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예식을 치르러 가십니다. 걷지 못함이 죄는 아니지요. 그러나 점점 아기예수는 자라가면서 자신의 의지로 말과 행동, 판단, 결정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는 인간이자 하나님으로써 인류의 모델이자 표본으로써 행하실 것입니다. 비록 아기일찌라도 말이죠. 그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지키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가끔은 불순종하며 배반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를 바라보며 돌아갈 줄 아는 것,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바라보며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라는 것이죠.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이런 예수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를 통해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율법을 창제한 신이 인간이 되어서 율법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인류를 대신해 율법을 완성하고, 그 길의 대표자로써 인류를 인도해가는 인생. 그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3-24절입니다.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율법에서는 장자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대표자 원리가 여기서도 등장하죠.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써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인류의 대표자가 되시어 예수의 율법완성이라는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서 우리는 거룩한 단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대표자 원리를 설명해주는 장자 정결예식을 예수는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던 것이죠. 그런데 24절에 보니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비둘기로 제사를 드립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양 대신에 비둘기로도 제사가 가능했습니다. 요셉의 가정형편이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예수의 인간됨이 더 확연히 드러나는 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율법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를 바라보며 요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행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제자로써 걸어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가난한 목수로써 또 자신의 씨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아기를 데리고 아비로써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또한 마리아와 함께 성령충만한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이지요.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모습이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는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당신이 만든 세계 안으로 기꺼이 들어온 하나님이었습니다. 놀라운 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내던진 신이었습니다. 그 예수를 바라보며 오늘도 명예롭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강해설교 > 누가복음_하나님의 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눅 2:36-39* (0) | 2024.01.15 |
---|---|
눅 2:25-35 (0) | 2024.01.14 |
눅 2:8-20 (1) | 2024.01.11 |
눅 2:1-7 (0) | 2024.01.10 |
눅 1:67-80 (0) | 2024.01.09 |
댓글